남풍을 타고 아득한 매화 향기가 전해 온다. 섣달 눈발 속에서 꽃 피우고, 눈꽃 같은 꽃눈 흔드는 매화다. 지지 마라, 지지 마라. 꽃잎 떨어뜨리지 말아라. 발 동동 구르다 실로 꽁꽁 꽃잎을 동여맸다. 한 땀 한 땀 비단 실로 수를 놓아 매화나무를 그렸으니 ‘자수매화도’ 10폭 병풍이다. 당대의 으뜸 화가 양기훈(1843~1919 전후)이 밑그림을 그렸다. 조선 후기 서울화단에 장승업(1843~1897)이 있었다면 평양화단은 양기훈이 이끌었다. 수(繡)로 유명한 평안남도 안주 지방의 안주수가 사용됐다. 핏빛처럼 붉은 매화 줄기는 군데군데 검은 옹이를 품었고 가지 끝은 연분홍색으로 파르르 떨린다. 굵은 실이 빛 아래서 올올이 반짝이며 스스로 꿈틀거린다. 보통 자수는 규방 여성들의 일이라 여기지만 안주수는 남성이 자수장이 맡았다. 가운데 심지를 넣고 수를 놓아 입체감을 준 까닭에 매화 가지가 핏줄같은 생명력을 품었다. 마치 밧줄처럼, 탄탄한 힘이 서린 것도 그 때문이다. 저토록 굵은 실로 비단 안팎을 이리저리 오가려면 무척이나 고단했을 것이다. 굳은살이 한겨울 흙만큼 딴딴했을 그들의 손가락이 눈에 선하다. 찬 땅 뚫고 싹 나오듯 힘찬 손가락들이 실을 밀어내 매화를 피웠다.
눈 속에서 피니 설중매(雪中梅)요, 일찍 펴서 조매(早梅)라 했다. 추운 겨울에 펴서 동매(冬梅)라고도 하지만 가장 먼저 봄을 불러와 춘매(春梅)로도 불렸다. “성긴 매화나무 그림자는 맑은 물 위에 드리우고(疎影橫斜小淸淺)/ 은은한 매화 향기 달빛 어린 황혼에 띄워 보낸다(暗香浮動月黃昏)”고 노래한 북송의 시인 임포(967~1028)는 아예 산으로 들어가 매화를 아내 삼고 학을 아들로, 사슴을 심부름꾼으로 둔 매처학자(梅妻鶴子)로 살며 매화시(詩)만 지었다. ‘화품(花品)’을 쓴 중국 남송의 장공보(1153~1211)는 매화를 두고 “자태와 운치가 외롭고도 빼어나 사람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아야 할 꽃”이라 했다. 삼국유사에는 신라에 불교가 전래 된 것을 ‘매화나무에 꽃이 핀’ 것으로 비유했고, 조선 시대에는 매화를 사군자의 하나로 떠받들었다. 벚꽃은 향이 없으나 매화는 한번 맡으면 잊히지 않는 그윽한 향기가 있다. 벚꽃은 바람결에도 박수 치지만 매화는 서리 속에서 주먹 불끈 쥔다. 실제로도 벚꽃잎은 끝이 갈라졌지만 매화 꽃잎은 둥글다. 같은 봄꽃이라 해도 마냥 즐거운 벚꽃과 달리 매화는 금욕적인 지조와 정절의 꽃이다. 양기훈은 그런 고고하고 강인한 매화의 자존심을 가졌던 화가이리라.
평양에서 4형제 중 셋째로 태어난 양기훈은 양반이기는 하나 높은 관리보다는 공부에 매진하는 유생을 많이 배출한 집안 출신이다. 그림 이외에 양기훈의 행적은 연구된 것이 부족하다. 흔히 ‘평양 출신으로 도화서 화원을 지내고 노안도(蘆雁圖)에 뛰어난 화가’로 정평 나 있다. 하지만 이마저도 아리송하다. 도화서는 1894년 시작된 갑오개혁으로 폐지됐고, 실제 양기훈이 그곳에서 화원으로 몸담았던 근거는 없다. 다만 1902년 고종황제가 서경(西京)인 평양에 행궁 성격으로 ‘풍경궁’을 짓게 했는데 여기서 양기훈이 그림 그리는 참서관으로 임명됐으니, 직함은 달라도 실제 왕실 그림 업무를 전문적으로 한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또 하나, 양기훈은 1883년 조선 최초의 미국사절단인 민영익(1860~1914)의 수행화원으로 동행했고 당시 경험으로 ‘미국풍속화첩’을 그린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이 또한 확인이 안 된다. 우선 화첩이 전하지 않고 봤다는 기록도 없으며 당시 수행원 명단에도 그의 이름이 없다. 양기훈을 연구한 서정민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학예사는 “양기훈이 대한제국기 궁중에 그림을 바쳤고 그림 관련 관직을 역임해 오인된 것으로 보인다”면서 “‘미국풍속화첩’을 그렸다는 이력도 재고되어야 할 부분”이라고 설명했다.
하나 분명한 것은 그의 그림이다. 국립고궁박물관에는 양기훈이 왕실을 위해 그린 ‘군안도(群雁圖)’를 비롯해 여러 폭의 자수 병풍과 그림들이 소장돼 당대 최고 화가의 위용을 자랑한다. ‘군안도’는 10폭 병풍을 거대한 하나의 화면 삼아 갈대 우거진 언덕과 휘영청 뜬 달을 운치있게 두고 수십 마리 기러기를 자유자재로 그려놓고 있다. 자연스러운 몰골법에 기러기의 둥근 머리가 정겹다. ‘기러기 그림’으로 이름 떨친 화가답다. 마지막 폭 끄트머리에 ‘신 양기훈이 공경히 그리다(臣楊基薰敬寫)’고 적었는데 신(臣) 자를 썼기에 황제인 고종에게 헌상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같은 ‘노안도’는 갈대를 뜻하는 노(蘆) 자와 기러기 안(雁) 자가 노년의 평안(老安)을 의미한다. 이것 말고도 ‘자수송학도’ 10폭 병풍도 왕실을 통해 2점이 전한다. 사선으로 가로지르는 둥치 굵은 소나무를 가운데 두고 장수를 상징하는 학이 노닐고, 대나무와 영지가 등장하기도 한다. 앞서 본 아모레퍼시픽미술관 소장품인 ‘자수매화도’처럼 국립고궁박물관에도 10폭 매화 자수병풍이 2점이나 남아 있다. 때로는 강렬하게 치솟은 줄기가, 때로는 화사하게 흐드러진 꽃잎이 강조되기도 했다. 자칫 일본 화풍을 떠올릴 정도로 장식적인 경향도 있기는 하나 1905년 전후로 제작된 이들 매화도 병풍을 그려 바치던 화가의 정성에는 왕실의 번영이 화려하게 꽃피길 축원하는 마음이 담겼을 것이다.
북한에서는 양기훈이 그린 너비 약 3m의 ‘붉은 매화’ 10폭 병풍이 국보로 지정돼있다. 깊은 밤 은은한 달빛을 맞으며 매화가 만개했고 그 가지 위에 새 두 마리가 졸고 있는 옅은 채색의 수묵화다. 꿈틀대는 매화 줄기의 기세가 용틀임 같건만 세상 모르고 졸고있는 새(숙조·宿鳥)들이 묘하게 어우러진다. 매화 그림이 17세기까지만 해도 지폐 5만 원권 뒷면에서도 볼 수 있는 어몽룡(1566~1617)의 ‘월매도’처럼 정적인 것이 주를 이뤘으나 조희룡(1789~1866)에 이르러 대형 화폭 전체를 매화 한두 그루로 꽉 채워 격동적인 움직임과 생명력을 거침없이 표현하기 시작했다. 전수식(全樹式)이라 칭하고 장육매화도(丈六梅花圖)라고도 부른 이 전통을 양기훈이 계승했다. 빠르고 거친 필치에도 불구하고 짧은 붓질이나 붓날림이 들뜨지 않고 차분해 균형을 이뤘다. 장대한 10폭 화면에서 장식성과 서정성이 절묘하게 결합했으니 당대 ‘유행 1번지’ 평양화단을 대표하는 양기훈의 면목을 유감없이 보여줬다. 이 그림은 남북관계가 무탈하던 지난 2006년 6월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북녘의 문화유산-평양에서 온 국보들’ 전시를 통해 공개되기도 했다.
양기훈과 미국사행단 민영익의 인연은 확인되지 않으나, 애국 충절의 독립운동가 민영환(1861~1905)과의 연은 그림으로 남아 전한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고 장지연이 ‘시일야방성대곡’을 황성신문에 게재해 한국인을 통곡하게 했던 그때, 민영환은 을사조약 파기를 필사적으로 상소하다 자결했다. 서울 인사동의 옛 태화관 자리이자 지금은 한미은행 종로지점 빌딩 앞인 그 곳에서 민영환의 피 묻은 옷과 단도를 근처 집으로 옮겼는데, 이듬해 여름 그 자리에서 상서로운 푸른 대나무 네 줄기가 솟아올랐다고 한다. 청죽(靑竹)은 신선세계에서나 자라는 영물이기에 사람들은 이를 충절의 넋 서린 ‘혈죽(血竹)’이라며 감탄했다. 이 사실이 ‘대한매일신보’ 등의 보도로 알려졌는데, 양기훈은 1906년 7월 17일자 지면을 통해 현장에서 직접 보고 그린 ‘민충정공 혈죽도’를 실었다. 목각판으로 인쇄한 ‘혈죽’ 그림은 애국심을 자극해 당시 대나무 솟아난 곳이 인산인해를 이뤘다고 한다.
“소멸되지 않는 것은 충의이고, 사라지지 않는 것은 정기이거늘 그 기가 하나로 뭉쳐 대나무로 자라났다. 단단한 가지와 올곧은 마디, 푸른 잎과 꼿꼿한 줄기는 공(민영환)의 드높은 기개를 다시 보는 듯하다. 그 장렬함에 힘입어 기울어진 나라가 부지되리라. 이를 그림으로 전하노니 고귀한 이름 만고에 빛나리라.” 화가 역시 그림으로 빛나는 이름을 남겼다.
/조상인기자 ccsi@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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