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4월 판문점 평화의 집에서 열린 남북정상회담 당시, 악수 나누는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뒤로 걸린 그림 하나가 세간의 이목을 끌었다. 대담한 색채와 정밀한 묘사가 공존하면서 호방한 기상을 보여주는 ‘북한산’. 김 국무위원장이 그림에 대해 물었고, 문 대통령이 그 기법과 내용을 소개하기도 했다.
바로 그 ‘북한산’의 작가 민정기(70)의 개인전이 서울 종로구 삼청로 국제갤러리에서 3월 3일까지 열린다. 서울대 회화과 출신인 민정기는 1970년대 국전을 중심으로 한 미술경향을 비롯한 추상미술에 반발해 1980년대 초 스스로 자신의 작품을 ‘이발소 그림’이라 칭하기 시작했다. 일종의 ‘비하발언’인 이것이 오히려 화단의 주목을 받게 했고 상투적이고 키치(kitsch)적인 작품은 역설적으로 일상의 공감을 끌어냈다.
그런 민정기 화백이 상업화랑에서, 더군다나 이 같은 대규모 갤러리에서 전시하기는 처음이다. 이번 전시에는 그의 구작 21점과 신작 14점이 함께 걸려 그간의 작품 변화를 한번에 둘러보게 했다. 신작 ‘청풍계1’에서는 교회처럼 높다랗게 솟은 건물이 시선을 끈다. 대한제국의 관료이자 일제 강점기 친일파로 유명했던 윤덕영이 인왕산 자락에 600평 규모의 프랑스식 건물을 지어 일명 ‘한양의 아방궁’이라 불린 호화 별장, ‘벽수산장’이다. 그러나 윤덕영은 그 집에 살아보지도 못한 채 세상을 떠났고, 이후 건물은 화재로 소실돼 1970년대 철거돼 흑백사진 등의 자료로만 그 흔적이 확인된다. 화가는 이 지역을 답사하고 관련 사료를 연구해 ‘청풍계’에 그 모습을 되살렸다. 사라진 ‘벽수산장’은 과거의 역사요, 주변을 빼곡히 에워싼 옥인동 연립주택의 모습은 현재의 풍경이다. 이 모두를 품은 자연은 색마저 범상치 않다.
이처럼 민정기의 작품들은 풍경화로 보이지만 과거와 현재가 교차하는 역사화이자 상상화이기도 하다. ‘박태원의 천변풍경’ 연작 또한 소설가 구보 박태원의 머리깎는 모습과 청계천 풍경이 절묘하게 엇갈린다. ‘사직단이 보이는 풍경’ 또한 벽과 보도블럭이 이루는 아찔한 선들이 숨가쁜 시간의 속도를 느끼게 하면서도, 그 안을 걸으며 휴대폰을 보는 도시인과 저 멀리 자리 지킨 사직단이 극적인 대조를 이룬다.
민정기는 1990년대 이후로 전국을 돌며 환생한 겸재 정선처럼 진경산수화법을 새롭게 탐구하고, 고산자 김정호처럼 발품 팔아가며 고지도를 연구하며 자신만의 화법을 모색했다. 그렇게 돌아돌아온 2000년대에 이르러 화폭에는 다양한 시점이 얹혔다. 한곳을 집중적으로 보는 듯하면서도 전체를 아우르고 과거와 현재가 교차하는 그런 풍경 말이다. 그런 재해석의 기법으로 그린 ‘유 몽유도원’은 조선 초기 안견의 몽유도원도 이미지 위에 현재의 부암동 풍경을 나란히 배치해 지세와 현실풍경을 극명하게 대비한다. ‘수입리(양평)’에는 동양화에서 흔히 볼 수 있던 전통적인 부감법과 투시도법을 사용한 동시에 산과 강의 현재 상황은 민화적으로 풀어냈다.
작가가 1980년대에 도시 풍경을 다뤘을 때는 자의적인 기호들이 주를 이뤘지만 지금의 서울 풍경에는 과거 역사나 현 지리를 포함해 직접 인연을 맺는 필연적인 요소들이 수수께끼처럼 얽혀 있다. 종로구에 위치한 청계천, 사직단, 세검정, 백사실계곡 등은 가 본 사람이라면 알아볼 만한 장소다. 물론 작가는 그런 풍경 아래에 인문학적 성찰을 두텁게 깔았다. “예전 것들을 통해 오늘날의 모습을 그린 것들”이라며 “발로 뛰고 공부하는 재미에 작업한다”는 민 화백은 “위성도 없던 시대인데 옛사람들이 그린 지도나 그림을 살펴보면 실제 그 자연 특성을 얼마나 명료하게 표현했는지 깜짝 놀랄 때가 많다”고 말했다.
그는 1980년부터 ‘현실과 발언’ 동인의 창립 멤버로 활동해 이른바 ‘민중미술’로 분류되는 작가이기도 하다.
/조상인기자 ccsi@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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