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제약사가 약값을 올려달라며 잇따라 국내 필수 의약품 공급을 잇달아 중단하고 있는 가운데 보건당국의 뒷북 행정이 도마에 오르고 있다. 환자의 생명이 경각에 달린 상황에서 글로벌 제약사와 협상력을 발휘하지 못한 채 소극적인 자세로 일관하는 행태를 지적하는 목소리가 높다.
13일 제약의료업계에 따르면지난 11일 인공혈관 제조업체 미국 고어가 심장 수술에 필요한 소아용 인공혈관 20개를 공급하기로 했지만 심장질환 수술을 앞둔 환자와 병원측의 불안은 가시지 않고 있다. 보건당국과 고어간 갈등의 불씨가 여전히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인공혈관 공급 재개를 위해선 정부와 고어 간 가격협상을 다시 시작해야 하는데 현재로선 협상이 순조로울 것으로 낙관하기 힘들다. 안상호 한국선천성심장병환우회 대표는 “고어 측에서 혈관 20개를 보낸 게 몇 달이나 버틸지 의문”이라며 “수술이 급한 서울아산병원에서 사용하고 나면 금세 소진될 것”이라고 말했다. 고어의 핀탄수술용 인공혈관은 국내에서 연간 40~50개가 사용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아웃도어 의류 소재인 고어텍스로 유명한 고어는 지난 2017년 9월 건강보험 상한 가격이 낮아 이윤이 적고 ‘의료기기 제조 및 품질 관리 기준(GMP)’ 인증을 더는 연장할 의사가 없다는 이유로 국내에서 철수했다. 당시 선천성 심장병 수술 횟수가 많았던 서울대병원과 연세대 세브란스병원, 서울아산병원은 고어가 의료기기의 공급을 재개할 때까지 재고를 확보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지만, 지난 2월 인조혈관 재고가 바닥을 보이면서 선천성 심장병 아이들의 수술이 무기한 연기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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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가운데 제약의료 업계에서는 보건당국의 행정 부재를 지적하고 있다. 국민 생명과 직결되는 필수의약품을 파는 제약사가 공급중단을 검토할 경우 정부가 협상력을 발휘해서 제약사가 원하는 가격과 정부가 원하는 가격 간 절충점을 찾아야 한다. 아울러 중장기적으로는 국가가 운영하는 공공제약사를 설립해 국내 기술을 개발하는 등 해결책을 찾아야 하지만 현실은 환자나 병원 쪽에서 다급함을 호소할 때나 전면에 나선다는 지적이다. 앞서 보건복지부는 고어가 인조혈관 국내 공급중단에 나선지 1년 만인 지난해 9월 희귀질환 수술에 꼭 필요한 희소·필수 치료 재료에 대해서는 건강보험 상한 가격을 인상해 주는 별도 관리 기준까지 마련했지만, 고어 측으로부터 어떤 반응도 듣지 못했다. 결국 정부가 미국으로 직접 건너가 고어를 만나겠다고 발표한 것은 국내 재고가 바닥 나고 이 사실이 언론에 알려지고 난 후인 지난 11일이었다.
문제는 약값 인상을 내세운 글로벌 제약사의 필수 의약품 공급중단이 비일비재하다는 점이다. 언제든 ‘제2의 고어 인공혈관 부족사태’가 발생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식약처에 따르면 희귀의약품으로 지정된 318품목 중 국내에 유통되지 않은 의약품은 76품목(23.9%), 국내 미허가 의약품은 14품목(4.3%)에 달한다. 지난 1월에는 일본계 다국적 제약사 한국쿄와하코기린은 식품의약품안전처에 ‘미토마이신’의 국내 수입을 중단하겠다고 통보했다. 미토마이신은 녹내장 및 라섹 수술의 보조제로 쓰인다. 당초 항암제로 개발됐지만 녹내장 수술의 상처를 빨리 치료해주고 라섹 수술 후 각막이 혼탁해지는 걸 억제해 안과용 필수 의약품으로 많이 쓰인다. 현재 녹내장·라섹 수술 후 미토마이신의 역할을 대체할 의약품은 없는 상태다. 이에 따라 미토마이신은 당장 이달 중순부터 국내 공급이 전격 중단될 전망이다
보건당국은 글로벌 제약사의 가격 인상 요구를 환자를 볼모로 한 횡포라고 간주하고 세계보건기구(WHO)에 문제를 제기하는 등 국제공조에 나설 방침이지만 실효성이 떨어질 것이라는 지적이 많다. 신약개발에 엄청난 연구개발(R&D)이 들어가는데다 이미 정부가 국제 평균 가격을 적용하고 있는 만큼, 다른 나라의 동의를 받기는 힘들 것이라는 설명이다. 대한의사협회 관계자는 “고어가 한국에 팔려고 했던 가격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 가격수준으로 알고 있는 만큼 쉽게 문제를 제기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며 “각각의 사례마다 주먹구구식 미봉책을 내놓게 되면 이 같은 상황이 계속 반복될 것”이라고 꼬집었다. /박홍용·우영탁 기자 prodigy@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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