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중 무역전쟁의 서막이 오른 지난해 상반기. 미국 국립과학재단(NSF)은 각 대학에 ‘중국과 공동연구과제를 하고 있거나 협력관계가 있으면 보고하라’는 공문을 보냈다. 당시 캘리포니아 UC머세드의 한 공대 교수는 “중국에서 자금지원을 받아 연구하는 교수를 파악하겠다는 뜻으로 중국의 인재·기술 유출 시도를 심각하게 보고 있다”고 전했다.
최근 미국 매사추세츠공과대(MIT)와 하버드대를 방문한 이건우 서울대 기계항공공학부 교수는 “중국계 교수가 ‘학교에서 중국 석·박사과정 학생이 많으니 더 이상 받지 않았으면 한다는 신호를 준다’고 토로하더라”고 말했다. 이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중국 유학생을 ‘스파이’로 취급하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실리콘밸리에서도 중국 자본의 인공지능(AI)·자율주행차 등 첨단기술 사재기와 인력 유치에 대한 견제가 거세다. 지난해 말 스탠퍼드대의 중국계 물리학 교수(장서우청)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건이 단적인 예다. 그는 중관춘개발그룹 등의 지원으로 5,000억원가량의 벤처캐피털을 운영하며 100여개 첨단 스타트업에 투자했다. 공교롭게도 그가 숨진 날 5세대(5G) 통신장비를 선도하는 화웨이 창업자의 딸(멍완저우 부회장)이 캐나다 공항에서 미국의 요청으로 체포됐다.
중국은 첨단기술 굴기 전략인 ‘중국제조 2025’ 등을 추진하며 중화인민공화국 100주년인 오는 2049년 미국을 따라잡겠다는 계획을 추진해왔다. 신(新)실크로드 전략인 ‘일대일로’를 통해 동남아와 중동·아프리카로 세력을 넓혀왔다. 2015~2017년 AI 등 미국의 전체 기술벤처 투자 중 중국 자본의 비중이 16%에 달할 정도다.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건 트럼프 대통령과 정면으로 충돌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신기욱 스탠퍼드대 아시아태평양연구센터 소장은 “미국은 중국의 첨단기술이 경제뿐 아니라 군사적으로도 이용돼 미국의 안보를 위협할 것을 걱정한다”고 분석했다.
미국이 큰 폭의 대중 무역적자(2017년 3,700억달러)를 해소하겠다는 이면에는 5G·AI·자율주행차·바이오·빅데이터 등 4차 산업혁명 주요 기술에서의 중국의 급부상을 더 이상 묵과할 수 없다는 판단이 있다. 중국 내에서의 외국 기업에 대한 기술이전 강요, 지적재산권 무시 등의 행태도 미국의 심기를 건드렸다. 중국의 국내총생산(GDP)도 지난 2000년 미국의 20% 선에서 2017년에는 3분의2 수준까지 치고 올라왔다.
과학기술정책연구원(STEPI) 명예연구위원인 홍성범 박사는 “미국은 1985년 플라자합의나 1991년 소련 해체 당시 자신들의 GDP 50% 수준일 때 일본과 소련을 때렸는데 2017년에 중국은 그 수준이 68%에 달했다”고 설명했다. 실제 미국은 1980년대 일본과 독일 기업이 세계를 휩쓸 때 플라자합의로 두 나라의 환율을 급격히 절상시켜 세계 주도권을 회복했다. 당시 2년 만에 엔화는 100% 가까이 절상된 반면 달러화는 30% 이상 절하돼 일본의 ‘잃어버린 20년’의 단초가 됐다.
미국의 거친 공세 등으로 중국은 최근 대미 기술벤처 투자가 주춤하고 반도체 양산 과정에 차질이 빚어지며 경제성장률도 둔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하지만 오히려 물밑에서는 첨단기술의 내실을 다지는 계기로 삼는 모습이다. 알리바바·바이두·텐센트·화웨이 등 글로벌 IT 기업이 있고 스타트업 창업도 활발하다. AI·빅데이터·전기차·드론·로봇·우주항공 등은 세계적 수준이고 자율주행차·바이오·나노소재·에너지기술도 우수하다. 중국 정부가 지난해까지 2년 연속 6.5% 안팎의 성장률을 제시하다 최근 6~6.5%로 낮췄으나 첨단기술력의 발전은 지속되고 있다. 홍 박사는 “중국은 국가 R&D의 방향도 글로벌 트렌드를 꿰뚫고 네거티브 규제 속 창업 열기도 여전하다”고 소개했다.
업계에서는 신산업에서 중국이 우리를 한참 추월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한상범 LG디스플레이 부회장은 최근 “AI나 빅데이터 등에서 경쟁국에 비해 한 발 뒤처져 있다. 정부가 혁신성장을 위해 효율적 산업 생태계 육성, R&D 지원 확대, 표준화 지원, 전문인력 양성에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더욱이 중국은 물론 ‘잃어버린 20년’을 극복한 일본이 수년 전부터 실리콘밸리로 속속 귀환하는 상황임에도 우리 기업들은 여전히 현지에서 제대로 접점을 찾지 못하고 있다. 실리콘밸리와 LA에 거점을 둔 IT 기업인 LMA의 윤태일 대표는 “한국 기업과 과학기술계가 현지에서 존재감이 미약한 실정”이라며 “민관 합동 벤처펀드를 조성해 실리콘밸리에 투자하거나 청년·엔지니어의 인턴과 연수를 늘려야 한다”고 제안했다. 물론 비자 문제가 있지만 기술인력에 대해서는 정부가 나서면 해결 방안이 있다는 것이다.
산업구조 전환과 함께 국가 R&D 혁신, 규제 완화, 고급인력 양성 등을 서둘러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권오경 한국공학한림원 회장은 “산업구조 전환, 지식재산권 전략 고도화, 과학·공학인재 양성을 뚝심 있게 추진해야 한다”고 힘줘 말했다. 페레츠 라비 이스라엘 테크니온공대 총장은 “이스라엘은 정부의 많은 R&D 투자를 통해 대학에서 특허 수입이나 고용 창출을 많이 한다. 바이오 등 신산업 규제가 별로 없고 정부·대학·벤처캐피털 간 창업 생태계도 좋다”며 “미중 무역분쟁에서 한국은 과학기술력을 높여야 한다”고 조언했다. /고광본 선임기자 kbgo@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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