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하노이 북미 2차 정상회담의 결렬은 전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협상 결렬 이후 돌아가는 길에 “대체 무슨 이유로 다시 이런 기차 여행을 해야겠느냐”고 말했다는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큰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포마드를 발라 빈틈없이 빗어넘긴 패기 머리를 했던 김 위원장이 협상 결렬 다음날 흐트러진 앞머리를 그대로 노출한 채 피곤한 모습을 드러낸 것만 봐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북한의 뒷배를 자처하며 측면 지원에 나섰던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당혹감도 김 위원장 못지않았을 것이다. 시 주석은 북미 2차 정상회담 이후 진행될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의 무역 담판 승부수를 구상하며 내심 주요2개국(G2) 패권국으로 성장한 중국의 힘과 아량(?)을 과시하고 싶었을 것이다. 미국이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 ‘중국제조 2025’도 적당한 선에서 자신의 체면을 유지하는 양보안을 내놓을 심산이었을지도 모른다.
북미회담에 앞서 시 주석은 김 위원장의 장거리 기차 여행길을 터주며 북한의 명실상부한 후견인임을 전 세계에 각인시키려 했다. 그런데 빅딜 아니면 노딜을 외치며 합의문 서명 없이 냉정하게 돌아선 트럼프의 돌발 행동에 시 주석의 머릿속은 복잡해졌을 것이다. 당장 미국과 중화권 주요 언론들은 트럼프-시진핑 차기 정상회담이 오는 6월 이후로 미뤄질 수 있다는 전망 기사를 쏟아내고 있다. 이르면 이달 말 늦어도 4월 중에는 열릴 것으로 예상됐던 미중 정상 간 최종 무역 담판이 사실상 기약 없이 미뤄지는 불길한 기운이 짙어지는 형국이다.
베이징과 워싱턴 외교가에서 해석하는 배경에는 트럼프의 불안한 탄핵정국 우려보다는 시진핑 지도부의 파국적 협상 결렬 가능성에 대한 염려가 더 유력하게 자리 잡고 있다. 트럼프 행정부는 중국의 무역 합의 이행을 확실히 보장하는 담보 장치에 대해 확신하지 못하는 분위기다. 이에 반해 시진핑은 트럼프 대통령이 아무런 합의 없이 단호하게 하노이 협상장을 떠났던 하노이 북미 협상 사태가 재연될 가능성을 염려하는 모습이 역력하다. 미국 월스트리트저널(WSJ)은 “베트남 북미정상회담장에서의 트럼프 대통령의 모습을 본 중국은 양자택일의 압박을 받을 수 있다는 걱정을 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베이징 외교가에서는 미중 정상 간 최종 무역 협상에서도 트럼프 대통령이 노딜을 선언한다면 절대 권력자인 시진핑의 체면이 크게 손상되고 자국 내 시진핑 리더십에 대한 비판과 정적들의 반발이 거세질 수 있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지난해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후계자 지명 없이 사실상 종신 황제의 길을 터준 중국 공산당에 트럼프-시진핑 무역 담판의 파국적 결말은 말 그대로 악몽이나 다름없다.
시진핑 지도부는 차기 미중 무역 정상회담이 톱다운 방식에 따른 즉흥적 결말이기보다는 실무진에 의해 합의문의 모든 내용이 확정된 상황에서 두 정상이 미소를 지으며 서명하는 멋진 정치 드라마의 하이라이트가 되기를 희망하고 있다. 하지만 현실은 결말을 예측할 수 없는 스릴러 영화의 몇 줄 안 되는 시놉시스처럼 흘러가고 있다. 마치 1년 전 미국 플로리다에서 열린 미중 정상회담에서 내놓았던 ‘미중 불균형 해소 100일 계획’의 데자뷔가 그대로 재연되는 분위기다. 첨예한 미중 무역 갈등의 요인을 100일 안에 분명히 정리하고 이를 한꺼번에 해소하겠다던 양국의 100일 계획 희망은 뚜렷한 시각차만 확인한 채 물거품처럼 꺼져버렸다. 100일 계획이 100일몽처럼 사라진 후 미중 무역 갈등은 중국산 수입품 2,500억달러어치에 대한 10~25%의 고율 관세 부과와 함께 무역전쟁 전면전으로 이어졌다.
전 세계를 공포로 몰아세운 미중 무역전쟁이 22일이면 1년을 맞는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해 3월22일 미국이 중국의 지식재산권 침해와 불공정 무역행위로 큰 피해를 입고 있다며 추가 관세 및 중국의 대미 투자 제한을 담은 행정명령에 서명하며 무역전쟁 포문을 열었다. 1년간 중국의 패권 야심을 분명히 확인한 트럼프 대통령이 시 주석과의 2차 정상회담을 앞두고 어떤 마음의 결정을 할지는 누구도 예단하기 힘들다. 하지만 북미 2차 정상회담에서 가장 예상하기 힘든 충격적인 엔딩을 보여줬던 트럼프 대통령이 시진핑에게 전하려는 메시지는 충분히 짐작 가능하다. 어설픈 봉합으로 자신의 체면과 중국의 신패권주의 야심의 불꽃을 꺼트리지 않으려는 시 주석이 고심하지 않을 수 없는 대목이기도 하다./hbm@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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