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일 대한항공(003490) 정기 주총장은 시민단체가 행동주의펀드의 역할을 하는 듯 보였다. 공공운수노조와 참여연대·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등이 51만5,908주(이날 참석 의결권 기준 약 0.7%)를 위임받아 기업가치를 훼손한 조양호 회장의 사내이사 선임과 관련해 반대 목소리를 높였다. 오너가의 일탈로 불거진 대한항공 사태는 창업 2세로 27년간 대한항공을 이끈 조 회장의 기업가정신도, 주주가치 제고 노력도 물거품으로 만들어버렸다. 주총 시작 이후 찬반이 갈려 혼란한 가운데 한 주주는 “조 회장 가족의 일탈로 생긴 문제는 처벌하면 된다. 조 회장을 끌어내리는 것이 대한항공이라는 기업에 좋은지 나쁜지를 판단하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조 회장 재선임 안건의 향배를 가른 것은 국민연금이었다. 이날 재선임 안건은 찬성 64.09%로, 재선임 기준(66.7%)에 2.6%포인트 부족했다. 금융투자 업계에서는 대한항공 주식 11.56%를 가진 2대 주주 국민연금이 반대 의견이 아닌 기권을 할 가능성이 높다고 내다봤다. 총수 일가의 사회적 물의로 기업가치가 훼손됐지만 아직 재판 중인 사안이라 혐의가 확정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관투자가들과 소액주주들에게 큰 영향력을 미치는 국민연금이 전날 반대 의견을 나타내면서 흐름은 급반전됐다. 2.6%포인트 차이를 볼 때 국민연금(11.56%)의 반대가 아니었다면 조 회장의 재선임 안건은 통과했을 것이라는 관측이다. 주주총회에서 국민연금이 큰 영향력을 휘둘러 총수의 경영권이 상실된 것은 처음 있는 일이다.
재계에서는 국민연금의 이번 의결권 행사로 민간기업의 경영권을 해치는 ‘연금사회주의’의 파도가 덮칠 것이라는 공포감이 확산되고 있다. 배상근 전국경제인연합회 전무는 “국민연금이 민간기업의 경영권을 죄지우지하면 기업가정신을 위축시키고, 시장에 부정적인 영향을 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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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의결권 행사를 두고 국민연금이 주주가치 제고를 판단 기준으로 삼기보다는 여론에 휘둘렸다는 지적이 나왔다. 반대 의견을 피력하기까지의 과정을 보면 알 수 있다. 국민연금 기금운용위원회 산하 수탁자책임전문위원회 주주권행사분과는 지난 25일 열린 1차 회의에서 주주가치 훼손 여부를 놓고 격론을 벌였다. 조 회장은 대한항공 납품업체들로부터 196억원어치의 ‘통행세’를 수수하고 자신의 형사사건 변호사 비용을 회삿돈으로 지출한 횡령 혐의 등으로 1심 재판이 진행 중이다. 이 때문에 이날 회의에서는 4대4로 결론이 나지 않았다. 하지만 26일 열린 2차 회의에서는 정반대의 결과가 나왔다. 회의 시작 전엔 이해상충 문제로 일부 위원이 제척되야 한다는 논란이 일면서 기권으로 표가 쏠릴 수 있다는 전망이 나왔다. 하지만 해당 위원이 표결을 강행한데다 급작스레 소집된 수탁자책임위 책임투자분과 위원의 가세로 반대표를 던진 위원이 6명으로 불어났고 숙의 과정에서 제외됐던 위원들을 동원한 것을 두고 의혹이 일었다.
더 큰 문제는 국민연금의 적극적인 의결권 행사가 수익창출이 목적인 금융자본의 힘을 키워 사회적 비용을 높일 수 있다는 점이다. 외국인 주주와 외국계 헤지펀드 등이 국내 주요 기업들의 지분투자를 늘려 경영간섭이 심해지는 최근의 상황을 보면 알 수 있다. ‘시체를 뜯어먹는’ 벌처펀드로 불리는 엘리엇매니지먼트에 삼성전자와 현대차가 공격을 받은 게 대표적인 예다. 국민연금이 총수 일가의 경영권을 겨냥하면 할수록 외국계 금융자본들의 경영권에 대한 영향력은 더 커진다. 엘리엇의 사례에서 보듯 금융자본들의 목표는 자사의 펀드 투자자들에 최대의 수익을 안겨주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수익이 낮은 사업이 재편되고 구조조정이 동반된다. 회사는 재무적으로 개선될지 모르지만 구조조정으로 인해 실업이 발생하는 등 사회적인 비용은 증가할 수 있다. 늑대를 피하려다 호랑이를 만난 격이 될 수 있다는 얘기다. 대한항공 역시 일명 강성부펀드로 불리는 KCGI가 그레이스홀딩스를 통해 모회사 한진칼(180640)의 2대 주주(12.8%)가 됨에 따라 부실사업 정리 등 사업 개편을 주문받고 있다. 대한항공 노조는 이에 대해 고용안정을 들어 반대 입장을 밝혔다.
국민연금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포스코·현대차·LG화학·네이버 등 국내 굴지 기업의 주식을 8~11%가량 보유하고 있다. 여론에 휩쓸려 지배구조를 흔들었다가는 사회적 비용만 늘릴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유정주 한국경제연구원 기업혁신팀장은 “(총수 퇴진 후) 펀드들은 실제 경영을 안 한 경우가 많아 실무경험이 떨어지는데다 궁극적인 목표는 수익 극대화”라며 “이번 사태로 정부가 정치적·정책적 목표를 위해 국민연금을 동원할 수 있다는 신호가 된 점도 우려스럽다”고 말했다. /구경우·김상훈기자 bluesquare@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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