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화는 일필휘지와 파격의 멋이라 했거늘, 격자에 먹을 채워넣었다. 필법, 준법과 양식이 중요한 수묵화 위에 원색을 거침없이 휘둘렀다. 한국화가 장재록(41)의 충격적인 신작 ‘또 다른 공간-숲(Another Place-Forest)’ 연작 10여 점이 다음 달 2일까지 서울 강남구 신사동 유엠갤러리에서 선보인다.
잘 알려진 그의 대표작은 반짝이는 외관을 가진 자동차, 화려한 샹들리에 시리즈다. 현대 기술문명과 남성의 욕망이 압축된 자동차와 반짝이는 것에 투영한 여성의 욕망을 상징적으로 그리되 그 표면에 자연물이 비치게 했다. 10여 년 전 첫선을 보였을 때 화단의 논란이 됐다. 서양의 명암법과는 반대로 동양화에서는 가장 빛나는 부분을 오히려 가장 진하게 그리고 그림자를 옅게 표현하는데, 이를 뒤집었기 때문이다. 작가는 자연을 극복한 인공물과 그 인공물에 다시 투영된 자연을 통해 “돌고 도는 동양의 윤회사상을 말하고자” 했다.
파격으로 단숨에 주목받는 작가로 부상한 장재록은 현대사회의 ‘욕망하는 풍경’을 지속적으로 보여주며 스스로 자신의 표현양식을 깨뜨렸다. 신작에서는 모눈종이를 채우는 기계적 작업방식으로 수행하듯 그림을 그렸다. 픽셀을 채워가는 모습은 디지털 사회를 살아가는 현대인의 자화상이다.
“공학자 아버지의 책상 위에는 늘 설계도면과 모눈종이가 놓여 있었고, 서예가인 어머니의 먹 냄새는 항상 친근했어요.”
미처 몰랐던 작가의 어린 시절이 불혹을 넘겨 작품에 드러났다. 캔버스에 한지를 붙인 후 연필로 격자를 그렸다. 왼쪽 상단에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해 오른쪽 하단으로, 순차적으로 작업하는 게 규칙이다. 그리고자 하는 대상은 미국 캘리포니아주 팜스프링에서 우연히 발견한 나무다. 경관이 너무나 아름다운 그곳에서 작가는 수세미처럼 뒤엉킨 덤불 숲을 발견했고 멋대로 자란 가지 탓에 어디에 있는 어떤 나무인지조차 가늠할 수 없게 된 모습을 그림에 담기로 했다. 다만 사진 촬영한 이미지를 확대해 픽셀로 나눈 다음 형상이 픽셀 한 칸의 50% 이상이면 검은색, 50% 미만이면 흰색으로 비워두는 방식이다. 이미지를 반올림하는 방식으로 그리고 지웠더니 대상은 간략해졌고 약간의 추상성도 갖게 됐다. 끝으로 완성된 그림 위에 작가는 노란색 사각형, 파란색 원형, 진분홍 선 등을 덧칠했
고 때로는 아예 그림의 일부분을 흰색으로 덮어버렸다.
“그림에 담긴 철학적 내용, 미학적 완성도 중요하지만 이유 없는 나의 감각을 분출하고 싶었습니다. 규칙과 강박으로 그리고 감각의 분출로 마무리했죠. 스승님들이 보신다면 ‘그림 잘 그려놓고 이 무슨 짓이냐’ 혼내셨을 법도 하지만요.”
수묵 풍경을 감상하려던 관객의 몰입을 ‘방해’하는 것으로 보였던 색(色)과 여백은 오히려 정신을 깨운다. ‘이것은 그림’이라는 각성과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라는 자문(自問)을 하게 한다. 때로는 선과 색이 확장성, 방향성도 가진다. 먹 대신 새로운 안료도 만들었다. 동양의 먹과 서양의 검은 안료를 섞은 일명 ‘재록블랙’이다. 점성을 더해 검정색이지만 붓질의 움직임이 그대로 드러난다.
“전통화를 배웠지만 현대적으로 폭넓게 변화시키고 싶습니다.” 최근에는 한국보다 해외에서 더 많은 전시가 열렸다. 그의 도전은 계속된다.
/조상인기자 ccsi@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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