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기화하는 경기불황 속에 온·오프라인업체 간 경쟁까지 격화되면서 유통가의 상식이 깨지고 있다. 상대적으로 구매단가가 낮은 제품을 팔던 편의점에선 100만원에 달하는 고가 와인이 불티나게 팔리는 반면 프리미엄 상품이 주를 이루던 백화점은 1만원대 저가 와인으로 고객 몰이에 나서고 있다. ‘편의점은 저가, 백화점은 고가’라는 유통가 방정식이 깨지고 있는 셈이다.
12일 유통업계에 따르면 편의점 GS25는 ‘와인의 여왕’으로 불리는 프랑스 명품 와인 ‘샤또마고 2000년 빈티지’ 20병을 판매한 지 1시간 만에 모두 완판됐다. 철저히 예약판매로만 진행된 이 와인의 가격은 99만원이다. 편의점에서 100만원에 육박하는 와인을 처음 내놓는다고 했을 때만 해도 성공 여부에 대해 반신반의했지만 소비자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샤또마고 2000년 빈티지는 세계적인 와인 평론가 로버트 파커와 와인 전문매체 ‘와인스펙테이터’가 100점 만점을 줄 정도로 유명한 와인이다. 또 세계 와인 애호가들의 높은 선호 속에 15만병만 한정생산되는 탓에 국내에서는 물량을 구하는 것 자체가 어려웠다.
편의점에서는 명품 와인 외에도 수십 만원을 호가하는 고가 상품들이 이례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 GS25가 가정의 달을 맞아 업계 최초로 내놓은 순금카네이션배지(3.75g)는 26만9,000원에 달하는 비교적 높은 가격임에도 일주일 만에 220개가 넘게 팔리며 6,000만원의 매출을 올렸다. 또 각각 45만9,000원에 판매되는 에트로 ‘페이즐리 클래식 보스톤백’과 보테가베네타 ‘인트레치아토’ 등 명품 백과 지갑도 예상을 뛰어넘는 인기에 힘입어 판매기간을 기존 5월에서 6월까지 연장했다.
편의점에서 고가제품의 완판 행진이 이어지는 동안 백화점과 대형마트에서는 저가상품을 앞세워 고객잡기에 나섰다. 콧대 높던 백화점에서는 1만원 이하의 저가 와인이 점차 영역을 넓히고 있다. 롯데백화점에서 1만원 이하 와인의 구성비는 2016년 12%에서 2017년 14%에 이어 지난해에는 20%까지 높아졌다. 특히 1만원 이하 와인의 매출 신장률은 2016년(5%), 2017년(7%), 2018년(11%) 등 매년 가파르게 늘고 있다. 박화선 롯데백화점 주류 바이어는 “백화점에서 판매되는 1만원 미만의 와인은 초보자가 부담 없이 접근할 수 있는 스타일로 입문자가 많이 찾는다”면서 “최근에는 젊은 여성들 사이에서 1만원 미만의 스파클링 와인이 인기를 끌면서 관련 시장도 커지고 있다 ”고 말했다.
마트에서도 가격대 1만원 안팎의 와인이 전체 판매의 절반 가까이 차지할 정도로 인기다. 이마트에서 판매되는 와인의 가격대별 매출점유율을 보면 1만원 미만 14.2%, 1만원대 30.9%, 2만원대 14.2%, 3만원대 14.2%, 4만원대 10.1%를 차지한다. 이마트가 지난달 해외 평균 판매가보다도 더 저렴한 1만9,800원에 선보인 ‘로손 리트리트 콜렉션 2종’(까베르네쇼비뇽·쉬라즈)은 출시 한 달 만에 1만병 넘게 팔려나갔다.
유통업계에서는 경기불황과 온·오프라인업체 간 치열한 경쟁 속에서 유통채널의 가격공식이 깨지고 있다고 분석한다. 온라인 채널의 전성기에 맞서 백화점과 편의점 등 전통적 오프라인 업체들은 새로운 가격정책으로 소비자에게 어필하고 있다는 의미다. 유통업계 관계자는 “경기불황 속에 편의점은 100만원을 호가하는 상품을 들고 나와 오히려 ‘어부지리’ 효과를 톡톡히 누리고 있다”며 “반면 이커머스의 직격탄을 맞고 있는 백화점과 마트는 단 돈 한 푼이라도 더 싸게 팔려는 치열한 가격전쟁을 통해 고객을 모시는 데 혈안이 돼 있다”고 설명했다. /김보리·허세민 기자 boris@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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