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들에게 ‘바나나’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나라는 필리핀이다. 실제로 필리핀은 세계 최대의 바나나 산지 중 하나다. 지난해 방한한 로드리고 두테르테 필리핀 대통령이 국내 기업 중 유일하게 이마트(139480) 본사를 찾은 것만 봐도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최근 국내 시장에서 최대 바나나 수출국인 필리핀의 위상이 조금씩 흔들리고 있다. 14억 중국인들이 필리핀산 고품질 바나나에 꽂히면서부터다. 필리핀 바나나 몸값이 치솟으면서 유통업계는 중남미산으로 눈길을 돌리고 있다. 성수기를 앞두고 품질 좋은 상품을 얻기 위한 유통가의 ‘바나나 쟁탈 전쟁’이 불붙는 양상이다.
13일 관세청에 따르면 지난 2015년 36만3,479톤이던 우리나라의 바나나 수입량은 매년 꾸준히 늘어나며 지난해 42만7,260톤으로 3년 새 17% 넘게 증가했다. 칼륨·철분·비타민·섬유질 등의 성분이 풍부한 반면 지방함량은 적어 다이어트 식품으로 바나나를 찾는 소비자들이 크게 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인들이 소비하는 바나나의 최대 수출국은 필리핀이다. 실제로 불과 3~4년 전만 해도 국내로 수입되는 바나나의 90% 이상은 필리핀산이었다. 하지만 최근 들어 뚜렷한 변화의 조짐이 감지되고 있다. 세계 최대 인구 대국인 14억 중국인들이 필리핀산 상급 바나나를 찾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과거 중국은 품질이 낮은 하급 바나나를 대량 수입하거나 자체 생산한 바나나를 유탕처리 또는 가공용으로 말려서 먹었다. 그러나 2013년부터 중국인들의 소득수준이 높아지면서 상급 바나나 수요가 늘었고, 이듬해 중국의 바나나 산지인 하이난에 불어닥친 태풍으로 자체 수확량까지 줄면서 필리핀산 상급 바나나로 수요가 몰리기 시작했다. 중국의 대형 수입업체들은 현금다발을 들고 필리핀 바나나 농가를 찾아가 시세보다 비싼 웃돈을 주면서 한국과 일본에 수출하던 물량을 가로채 갔다.
이에 국내 유통업체들은 필리핀산 비중을 줄이는 대신 상대적으로 가격이 낮고 안정적 수급도 가능한 중남미산 바나나 확보에 나서고 있다. 신세계푸드(031440)는 2017년 ‘바나밸리’로 이름 붙인 에콰도르산 바나나 브랜드를 출시하고 매년 중남미산 비중을 높여가고 있다. 롯데마트도 2016년 과테말라에 이어 2017년 멕시코에서 생산된 바나나를 들여오고 있다. 홈플러스는 지난해부터 페루와 에콰도르산 바나나 수입을 본격 확대한 데 이어 올 3월 베트남 최대 기업인 빈 그룹과 전략적 제휴를 맺고 베트남산 바나나를 저렴한 가격대에 수입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국내 유통업체들이 중남미산으로 눈을 돌리면서 필리핀 바나나의 수입 비중도 가파르게 줄고 있다. 2015년 90.4%에 달했던 필리핀산 바나나의 수입 비중은 지난해 77.7%까지 낮아진 반면 같은 기간 에콰도르와 과테말라 등 중남미산은 7.0%에서 20.0%로 3배 가까이 늘었다. 또 2015년만 해도 국내에서 쉽게 찾아볼 수 없었던 베트남과 인도네시아산 바나나도 매년 수입물량이 늘고 있는 추세다.
유통업계 관계자는 “과거 랍스터와 아보카도, 치즈 등 중국인들이 먹기 시작한 식재료의 국제 거래가격이 급등하면서 품귀 현상끼지 빚어진 적이 있다”며 “바나나 소비의 성수기인 5~7월을 맞아 업체 간 물량 확보 경쟁이 치열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 KOTRA에 따르면 2010년 연간 2톤에 불과하던 중국의 아보카도 수입량은 지난해 4만톤으로 급증하면서 멕시코산 아보카도 가격이 역대 최고가를 갈아치우기도 했다.
/김현상기자 kim0123@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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