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사회가 하나의 화살이라면 기초과학은 시시각각 변하는 바람에 예민하게 반응하며 나아갈 길을 제시하는 화살촉의 끝부분과 같습니다.”
‘다시 기초과학이다:대한민국 혁신성장 플랫폼’을 주제로 15일 그랜드&비스타워커힐서울에서 개최된 ‘서울포럼 2019’ 기조강연자로 나선 카를로 로벨리 엑스마르세유대 이론물리학센터 교수는 “자동차와 스마트폰, 그 안에 들어가는 반도체까지 사용하는 모든 기술이 기초과학을 기반으로 한다”며 이같이 말했다.
‘제2의 스티븐 호킹’으로 불리는 로벨리 교수는 대표적 기초과학 분야인 우주과학의 석학으로 세계 최초로 중력의 크기에 따라 시간의 개념이 달라지는 ‘루프 양자 중력’ 현상을 밝혀냈다. 특히 그는 다양한 문화예술 작품을 인용해 자신의 복잡한 연구 성과를 알기 쉽게 설명함으로써 전 세계에 많은 팬을 확보하고 있다.
서울포럼 개막에 앞서 진행된 본지와의 사전 인터뷰에서 “기초과학의 마법과 아름다움, 그리고 그 미스터리에 대해 서울포럼 참석자들과 소통하고 싶다”며 기대감을 나타냈던 그는 이날 기조강연에서도 미리 준비한 회중시계 2개와 시선을 끄는 빨간 노끈을 활용해 △시간 △현재 △과거·미래를 주제로 기존 관념을 뒤집는 자신의 연구 결과를 알기 쉽게 소개해 청중을 사로잡았다.
로벨리 교수는 “시간은 여러분이 어디에 있느냐에 달려 있다”며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선형적 시간의 흐름은 ‘평평한 지구’라는 제한적인 조건에서만 가능할 뿐 여러분이 있는 공간의 중력이 커질수록 점차 느려져 블랙홀 근처에서의 몇 분은 지구의 수백년에 해당한다”고 소개했다. 이어 “당신의 현재는 정보가 보내지는 순간과 정보를 받는 순간의 시차가 작은 주변 환경에 대한 최근의 대략적 정보일 뿐 우주로 범위를 넓히면 ‘현재’라는 개념은 없다”고 설명했다. 그는 “사람과 달리 우주는 과거와 미래를 구별하지 않으며 우리가 아는 과거와 미래는 개체가 우주의 나머지 부분과 상호 작용하는 방법일 뿐”이라고 덧붙였다.
로벨리 교수는 이날 자신의 경험에 바탕을 둔 기초과학 교육에 대한 솔직한 생각도 털어놓았다. 끊임없이 여러 분야를 방황하는 ‘느린 탐구’야말로 그가 제시하는 기초과학의 해법이다.
로벨리 교수는 “나에게 시간이 어떤 때는 느리게, 또 어떤 때는 빠르게 가는 것이 몹시 매력적으로 느껴졌다”며 “기초과학의 매력을 만끽하려면 각자 앞에 놓인 잘 닦인 길을 맹목적으로 따르기보다 끊임없이 여러 학문을 접하고 궁금해하고 때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의식의 흐름을 따르는 여유를 가져야 한다”고 밝혔다.
로벨리 교수 스스로도 배움의 과정에서 이 같은 방법을 실천해왔다는 점에서 이날 강연은 더 큰 공감을 이끌어냈다. 그는 세계적 석학으로는 드물게 한곳에 정착해 특정 분야의 연구에 집중하는 대신 이탈리아 볼로냐대와 파도바대, 영국 임피리얼칼리지와 미국 예일대·시러큐스대·피츠버그대, 프랑스 엑스마르세유대까지 수많은 대학을 다니며 여러 스승을 모시고 학풍을 익혔다. 그 결과 박사 학위도 상대적으로 늦은 나이에 취득했으며 세계적인 관심을 끈 첫 저서 ‘모든 순간의 물리학’이 나오기까지는 연구성과도 큰 인정을 받지 못했다.
일찍부터 전공을 결정해 한 분야만 파고드는 것을 중시하는 한국 기초과학 교육의 풍토에 대해서는 “실패나 진로전환에 대해 관대하라”고 조언했다. 로벨리 교수는 “알버트 아인슈타인은 20세기의 가장 창의적인 과학자지만 그만큼 잘못된 논문을 많이 쓴 사람도 찾기 힘들며, 뉴턴은 위대한 물리학자인 동시에 생물학자·화학자·수학자·천문학자였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며 “호기심을 느끼지 못하거나 스스로 조급하게 만드는 공부를 하고 있다면 새로운 분야에 뛰어드는 것은 오히려 격려해야 할 일”이라고 주장했다. ‘선택과 집중’으로 대변되는 그간 한국 사회를 휩쓴 교육 기조를 정면으로 거스르는 지적이다.
특히 현대사회가 복잡해질수록 ‘느린 탐구’의 중요성은 더 커질 것이라고 로벨리 교수는 강조했다. 그는 “기초과학은 하나의 사고방식”이라며 “광범위한 분야의 지식과 자신에 대한 신뢰에 바탕을 둔 자율적 사고만이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낳는 유일한 길”이라고 말했다. /양사록기자 sarok@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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