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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백남준을 만나다]베니스비엔날레 수년간 예행연습·사교활동..."간다면 1등 자신"

<10>백남준과 황금사자상

1992년 국립현대미술관서 첫 대규모 회고전

주요작품 총망라...백남준 전모 조망 기회 제공

전시 연계 프로그램으로 국제 심포지엄 제안

베니스 비엔날레 총감독 맡은 올리바도 섭외

'우물안 개구리'이던 한국 미술 세계에 알려

개막식 도와준 뉴욕 전속 화랑주 할리 솔로몬

국가관들 앞에 큰 배 띄워 선상파티 열기도

백남준이 1993년 베니스비엔날레에서 최고의 국가관 전시에 수여하는 황금사자상을 받아들고 기뻐하고 있다. 사진 맨 왼쪽이 백남준과 함께 독일관 공동작가로 참가한 한스 하케이다. /사진제공=이정성






여느 때처럼 백남준은 식사가 준비된 테이블 앞에서 조간신문을 읽고 있었다. 1992년 8월 중순, 전시를 위해 방문한 독일 본에서의 아침이다.

“존 케이지(1912~1992·독일 현대음악가 겸 전위예술가)가 죽었네.”

백남준은 추모하듯 잠시 고개를 숙이고 부고를 읽더니 입을 열었다.

“왜 죽는지 알아? 그전까지는 그렇게 유명하지 않았는데 지명도가 쌓이고 일이 많아지니까, 바빠서 죽은 거야. 바빠지면 제 명에 죽지 못해.”

또 짧은 침묵이 이어졌다. 백남준이 신문을 접어 밀어내며 다시 말했다.

“오래 살려면 나도 일을 천천히 해야 하는데. 일을 좀 천천히 해야겠는데 말이지, 하지만 사교를 해야 하고 현장에도 가야 해.… 내가 사교를 하면 상을 받을 수도 있어. 내가 현장에 안 가도 2등, 3등쯤은 할 테지만 내가 간다면 1등 할 수 있어.”

이듬해인 1993년 6월 이탈리아에서 개막하는 베니스비엔날레를 겨냥한 말이었다. 그가 말하는 ‘사교’라는 것은 로비활동의 엽렵한 표현일 수도 있으나, 자신이 직접 나서 사람들을 사귀며 소통해 그의 생각과 작품에 대해 피력하는 일을 두루 아우르는 게 더 정확하다. 일제 시대에 국어 교육을 받았고 성인이 된 뒤로는 일본·독일·미국 등지에서 살았던 백남준 특유의 말투이기도 하다.

즉흥적이고 충동적인 것처럼 보이는 백남준이지만 실제 그는 길게 시간을 두고 먼 장래를 내다보는 편이었고 치밀하게 계획하고 준비하는 성격이었다. 수더분하고 욕심 없는 듯한 그의 도전심을 특히 자극하는 행사가 바로 베니스 비엔날레였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국제 미술제이자 가장 권위 있는 미술행사라는 것만으로도 매달릴 이유는 충분하다. 하지만 ‘반(反)예술적 예술’을 펼치며 예술의 전복을 지속해 온 백남준으로서는 상징성이 크고 남달랐다. 음악가로 출발한 그가 전위예술운동 끝에 도달한 비디오 예술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주류 미술계에 입성시키는, 등용문이요 개선문이 바로 베니스 비엔날레였기 때문이다.

독일관 옆에 위치한 한국관. 백남준은 1993년 독일관 작가로 참여하면서 바로 옆 빈자리를 눈여겨 보다 한국관 건립으로 이어지게 했다. /베니스=조상인기자


베니스비엔날레 참여는 물론 대상인 황금사자상 수상과 나아가 한국관 건립까지 일거삼득(一擧三得)을 내다본 백남준의 ‘빅픽처’는 수년 앞서 시작되고 있었다. 1991년 스위스에서 시작해 독일 등 유럽에서 열린 후 1992년 국립현대미술관으로 이어진 ‘백남준, 비디오 때·비디오 땅(Video Time-Video Space)’ 전시 때는 “베니스 비엔날레 예행연습이야”라는 말을 종종 내뱉었다. 1992년 로마의 팔라조 데 익스포지션에서의 전시를 개막한 후에는 작업실 동료·조수들을 모두 이끌고 베니스로 향했다. “내년에 비엔날레 전시할 곳이니 공간을 미리 익혀두라. 현장을 봐야 실제로 작업할 수 있다”고 말한 백남준은 무엇 하나 대충인 게 없었다.

1992년 7월 30일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개막한 전시는 해외에서 더 유명한 백남준을 위해 모국의 국립미술관이 마련한 첫 번째 대규모 회고전이라는 점에서, 그의 초기작부터 근작까지 주요 작품을 총망라해 백남준의 전모를 조망할 수 있는 기회라는 점에서 각별했다.

그는 전시 연계프로그램으로 국제 심포지엄을 제안했다. 이듬해 열릴 베니스비엔날레를 위한 ‘사교’의 시작이었다. 1993년 대전 국제엑스포의 전시행사를 책임지고 있던 이용우 전 광주비엔날레재단 대표이사가 이 심포지엄을 기획하고 추진했다. 이때 백남준은 참가자로 아킬레 보니토 올리바(90)를 섭외해 달라고 당부했다. 이탈리아 출신의 미술평론가인 보니토 올리바는 1980년대 이탈리아 미술사조 중 하나인 ‘트랜스아방가르드’ 운동의 이론적 배경을 제공한 로마대학 교수였다. 신(新)형상주의라 불리는 ‘트랜스아방가르드’가 역사와 대중문화의 이미지를 차용하고 신비하면서도 초현실적인 유머를 드러내는 등의 속성은 백남준의 예술과 맞닿아 있다. 보니토 올리바가 프리다 칼로·조지아 오키프·폴 클레 등과 함께 백남준에 관한 책을 쓰기도 했지만, 그가 1993년 베니스 비엔날레 전시 총감독을 맡았다는 사실이 더욱 의미심장하다.

백남준이 제안하고 국제적 미술계 관계자들의 참여를 독려한 ‘현대미술 세기의 전환’ 심포지엄은 20세기 현대미술운동을 검증하고 21세기를 전망해 본다는 뜻을 담아 ‘ART 20/21’이 부제로 붙었다. 1992년 7월 30~31일 양일간 서울 힐튼호텔에서, 이어 8월 3일 경주 힐튼호텔로 장소를 옮겨 총 5부의 행사가 열렸다. 해외에서 26명, 국내에서 8명 총 34명이 참가했는데 굵직한 연사들의 면면으로는 유례없는 큰 행사였다.



미술사학자 바바라 로즈, 어빙 샌들러 뉴욕 주립대 교수, 데이비드 로스 뉴욕 휘트니미술관장이 방한했고 프랑스 누보레알리즘 창시자인 피에르 레스타니, 비디오 전문 이론가 장 폴 파르지에, 뉴욕타임스의 저명한 미술평론가 그레이스 글룩 등이 처음으로 한국의 미술계를 경험했다. 베니스비엔날레 독일관 전시감독으로서 백남준을 참여작가로 선정한 클라우스 부스만 뮌스터시립미술관장을 비롯해 베니스 비엔날레 심사위원이 된 이들도 심포지엄 참가자에 포함됐다.

한국 쪽은 행사 좌장인 이용우 뿐만 김홍남·김홍희·서성록·송미숙·유홍준·윤범모·정영목 등 30~40대 젊은 미술사학자와 평론가들이 주축을 이뤘다. 이들은 훗날 주요 미술관장과 기관장 등을 맡아 문화계 거물로 성장했다.

삼성전자를 통해 백남준의 TV작업을 도와 온 홍라희 전 삼성미술관 관장도 거들었다.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의 부인인 정희자 전 아트선재미술관 관장이 심포지엄을 파격적으로 후원했고 그 딸인 김선정 현 광주비엔날레재단 대표이사가 측면지원을 맡았다. 수백 명 청중을 수용할 수 있도록 연회장인 그랜드볼룸이, 해외 인사들의 숙소로 힐튼호텔의 스위트룸이 제공됐다. 행사는 대성황이었다. 20만 원 넘는 입장료에도 불구하고 ‘전석 매진’ 됐다.

마지막 경주 힐튼호텔에서의 행사날 정희자 관장은 호텔 내 클럽의 하룻밤 ‘영업 중단’을 선언하고 심포지엄 관계자들을 위한 파티장으로 자리를 내줬다. 한국 특유의 노래방 문화가 흥을 돋웠고 못 이기는 척 한국을 찾은 보니토 올리바는 이탈리안 특유의 유쾌한 춤까지 췄다. 이 심포지엄은 그때까지만 해도 ‘우물 안 개구리’이던 한국미술계의 눈을 열어준 동시에 해외 관계자들에게는 백남준을 낳은 한국과 그가 이끄는 한국 미술계를 새롭게 보게 하는 계기가 됐다.

베니스비엔날레 독일관의 현재 모습. 백남준은 지난 1993년 베니스비엔날레 독일관 대표작가로 참가해 황금사자상을 받았다. /베니스=조상인기자


그렇게 백남준은 베니스 비엔날레로 순항했다. 백남준의 뉴욕 전속 화랑주 할리 솔로몬(1934~2002)은 개막식을 도왔다. 유대인 출신인 솔로몬은 뉴욕 소호에 자신의 이름을 딴 갤러리를 운영했고 미국 내 주요 미술관의 보드멤버(이사)였다. 그는 동양에서 온 ‘황색 재앙’이던 백남준을 미국 주류사회로 끌어넣는 가교였다.

비엔날레 개막 날 저녁에 열리는 각 국가관의 ‘오프닝 파티’는 일종의 보이지 않는 세력다툼이다. 동시다발적으로 베니스 곳곳에서 열리는 파티라 주요인사가 어디에 많이 몰렸는지에 모두 촉각을 곤두세운다. 솔로몬은 국가관들이 모여있는 자르디니(카스텔로 공원) 앞에 큰 배를 띄웠다. 선상파티가 열렸다. 귀빈을 한 명씩 태운 배는 베니스의 석양을 가장 아름답게 감상할 수 있는 곳이자 초대된 사람에게만 개방되는 페기구겐하임 미술관으로 이동했다. 구겐하임 옥상을 통째 빌려 연 파티에는 비엔날레 심사위원들을 포함한 주요 인사들이 모두 참석했고, 백남준의 예술세계에 대해 좀 더 가까이서 친밀하게 얘기 나눌 수 있는 ‘사교’의 장이 됐다.

물론 ‘사교’가 전부는 아니다. 백남준이 참가한 독일관 전시는, 어쩌면 반드시 상을 받아야 할 운명이었다. 우선 독일이 통일된 후 단일관으로 참가한 첫 전시라는 역사적 의미가 컸다. 1909년 바이에른관으로 처음 세워져 1912년부터 독일관으로 불렸으나 1945년 이후 서독관과 동독관으로 나뉜 이곳에서 백남준과 한스 하케는 냉전 종식을 선언할 뿐 아니라 전 세계를 품는 새로운 역사의 시작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1993년 6월 13일 오전 11시, 베니스 비엔날레의 공식 개막식이 열렸다. 회화부문 대상은 스페인관의 안토니 타피에스와 리처드 해밀턴에게, 조각부문 대상은 미국관의 로버트 윌슨이 받았다. ‘최고 독립관상’은 가장 영예로운 상이라 마지막에 호명됐다.

“독일관의 한스 하케와 백남준!”

박수와 환호 속에 파란 재킷의 하케와 특유의 주머니 달린 헐렁한 흰 셔츠 위에 멜빵을 두른 백남준이 시상대로 나갔다. 황금사자상을 들어 올렸고 카메라 세례가 이어졌다.

“심사위원들의 만장일치로 독일관이 황금사자상을 받은 것으로 안다. 상을 탄다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올림픽처럼 꼭 상을 타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독일 국적이 없는 나와 독일에 비판적인 작업을 많이 해온 하케를 공동대표로 선정한 것은 독일관이 상을 받건 안 받건 국가 이미지 개선에 크게 도움이 되는 아주 현명한 선택이었다고 본다.”

취재진의 쏟아지는 질문에 백남준은 영어와 독일어로 담담하게 대답했다. 조셉 코수스, 장 피에르 레이노, 일리야 카바코프와 함께 ‘명예상’에 그친 루이스 부르주아가 아쉬움에 눈물을 흘렸을 정도로 수상경쟁은 치열했다. 하지만 이게 끝은 아니었다. 백남준은 비엔날레 100주년인 2년 후에 기필코 한국관을 개관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었다.
/베니스=조상인기자 ccsi@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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