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식회계 의혹을 받는 김태한 삼성바이오로직스 대표가 구속 위기를 면하면서 삼성바이오로직스가 창사 이래 최악의 고비를 넘겼다. 하지만 세계 최대 바이오의약품 위탁생산(CMO) 전문기업으로 부상한 삼성바이오의 앞날은 여전히 첩첩산중이다. 검찰 수사의 장기화로 대외 신인도가 계속 추락하고 있어 향후 글로벌 수주와 제4공장 신축 등 핵심 전략에 차질이 불가피할 전망이다.
25일 서울중앙지법 송경호 영장전담 부장판사는 분식회계와 관련해 증거인멸을 지시한 혐의로 구속영장이 청구된 김태한 삼성바이오로직스 대표에 대해 “김 대표의 혐의에 대해 다툴 여지가 있기에 현 단계에서 구속 사유와 필요성을 인정하기 어렵다”며 검찰의 구속영장을 기각했다.
김 대표에 대한 법원의 구속영장 기각으로 삼성바이오는 최고경영자(CEO) 경영 공백이라는 위기는 일단 넘겼지만 당분간 경영 정상화가 어려울 전망이다. 김 대표는 다음 달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열리는 세계 최대 바이오전시회 ‘바이오 USA’도 불참을 최근 결정했다. 김 대표는 삼성바이오를 설립한 2011년부터 매년 이 행사에 참여했왔지만 지난해 처음으로 분식회계 사태가 불거지면서 검찰 수사 등으로 참여하지 못한 바 있다.
전 세계 바이오 산업 트렌드를 제시하는 바이오 USA는 글로벌 제약사가 총출동하고 현장에서 업무 협력까지 체결되는 경우가 많아 글로벌 바이오 네트워킹의 산실로 꼽힌다. 하지만 지난해에 이어 2년 연속 김 대표가 바이오 USA에 불참하면서 수주 계약 차질 등 막대한 타격이 예상된다.
삼성바이오의 사업 차질은 이미 가시화되고 있다. 업계에서는 지난해 말 준공을 마치고 시생산 중인 삼성바이오 제3공장 가동률이 30% 수준에 불과한 것으로 보고 있다. 분식회계 사태가 장기화하면서 당초 자신했던 글로벌 바이오의약품 수주 작업에 심각한 차질을 빚고 있는 것 아니냐는 분석이 나온다. 바이오의약품 CMO 사업의 특성상 자세한 계약사항을 공개하지 않지만 업계에서는 올해 삼성바이오가 최종 수주에 성공한 계약이 한 자릿수에 불과한 것으로 추정한다.
계속되는 검찰 수사로 삼성바이오의 글로벌 신인도가 급격하게 추락하고 있다는 점도 큰 부담이다. 글로벌 제약사가 윤리 기준에 유난히 엄격하다는 점에서 삼성바이오의 향후 수주에 불리하게 작용할 가능성이 높아서다. 본질적인 바이오의약품 CMO 경쟁력에는 문제가 없지만 의약품을 판매하는 바이오·제약 업계가 다른 산업군보다 유독 엄격한 내부 윤리기준을 적용하고 있다는 게 가장 큰 이유다.
제4공장 신축 등 삼성바이오의 핵심 전략에도 차질이 불가피할 것으로 점쳐진다. 글로벌 CMO 전문기업들이 규모의 경제를 달성하기 위해 연일 생산공장 증설에 사활을 걸고 있는 상황에서 이른바 ‘골든타임’을 놓치는 게 아니냐는 우려가 나온다. 삼성바이오와 함께 ‘K바이오’의 대표주자로 주목 받았던 셀트리온은 지난 16일 오는 2030년까지 40조원을 투자하겠다는 청사진을 내놓는 등 적극적인 행보를 보이며 대비되고 있다.
김 대표는 삼성의 미래 성장동력인 바이오 사업을 총괄하는 실질적인 사령탑 역할을 해왔다는 점에서 일찌감치 주목을 끌었다. 삼성토탈 기획담당 전무로 근무하다 2007년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꾸린 신수종사업 태스크포스(TF)에 합류해 삼성바이오로직스 설립의 산파 역할을 맡았다. 2011년 창립 후 불과 7년 만에 연간 36만ℓ 규모의 세계 최대 바이오의약품 CMO 전문기업으로의 도약을 이끌어낸 주역으로 평가받지만 분식 회계 사태 장기화로 그의 행보에도 먹구름이 끼어 있는 상황이다.
한편 삼성 그룹 차원에서 보면 일단 한숨을 돌리게 됐다는 게 중론이다. 최근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삼성바이오의 회계부정 논란 등에도 불구하고 의욕적인 경영 행보를 보여왔다. 만성화된 투자 기근 속에서 10년간 133조원이라는 매머드급 비메모리 투자를 발표했고 기술 패권 전쟁터가 되고 있는 5G 이동통신 시장 공략을 위해 NTT도코모 등 일본 통신업체 최고경영자(CEO)도 접촉했다. 특히 인도 나렌드라 모디 총리, 조지 W 부시 전 미국 대통령 등 외국 국빈들과도 만나면서 삼성 위상을 높였다. 이번 영장 기각을 계기로 조직을 다잡고 경영 활동에 더욱 매진할 것으로 관측된다.
재계의 한 임원은 “일단 이 부회장으로서는 최악의 상황은 피한 셈”이라며 “미·중 무역분쟁의 불똥이 반도체 등 핵심사업으로 튀고 있어 비즈니스 측면에서 리스크 관리에 매진하지 않겠느냐”고 언급했다. 또 다른 임원은 “삼성바이오로직스도, 삼성전자도 뭔가를 벌리기엔 안팎의 악재가 산적해 어수선하다”며 “내부 동요를 최소화하면서 구심점을 갖도록 경영진부터 솔선수범할 것으로 보인다”고 짚었다.
한편으로는 검찰의 칼날이 삼성전자의 핵심 수뇌부로 향하고 있는 만큼 이에 대한 대비에 더욱 만전을 기할 것으로 전망된다. 재계의 또 다른 관계자는 “회계 논란이 결국 이 부회장의 경영권 승계와 맞물려 있는 만큼 한시도 긴장을 놓을 수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이지성기자 engine@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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