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5년 9월22일 미국 뉴욕 플라자호텔. 미국과 영국·독일·프랑스·일본 등 주요5개국(G5) 재무장관이 모였다. 훗날 미국 국무장관으로 발탁된 제임스 베이커와 영국·독일·프랑스·일본 등 5개국 재무장관은 힘겨운 줄다리기 끝에 합의문에 서명했다. 내용은 “달러화 가치를 내릴 수 있도록 함께 노력하고 대외 불균형 축소를 위해 재정통화 정책에 동조한다”는 것이었다. 합의에 참가한 각국 재무장관들은 이 짧은 합의문의 파장이 얼마나 클 것인지 당시는 예상하지 못했다. 귀국한 다케시타 노보루 일본 대장상은 “미국이 일본에 항복했다”며 한껏 들떴다. 강한 엔화로 상징되는 일본 경제가 약달러의 미국 경제를 이겼다는 상징적인 수사였다. 2차 대전에서 미국에 패한 일본의 자존심을 띄우기에 충분한 언급이었다. 하지만 합의 당시 달러당 260엔이었던 엔화가 2년 후 120엔대로 떨어지자 다케시타 대장상은 자신의 발언이 실수였음을 인정했다. 10년 뒤 달러 대비 엔화 환율은 70엔대로 추락하면서 ‘잃어버린 10년’의 도화선이 됐다. 결국 일본에 있어 플라자합의는 2차 세계대전 패배와 맞먹을 만큼의 치욕적인 사건으로 변해버렸다.
◇플라자합의 데자뷔 우려하는 中=미국은 1985년 경상수지 적자가 당시 국내총생산(GDP) 대비 2.8%인 1,182억달러까지 치솟고 재정수지 적자가 GDP의 5%인 2,123억달러로 급증하면서 쌍둥이 적자 폭이 커지자 일본을 겨냥해 플라자합의를 이끌어냈다. 엔화 평가 절상을 통해 무역 적자를 해소하겠다는 뜻이었다. 여기에는 미국을 상대로 이득을 본 국가들이 인위적으로 통화 가치를 떨어뜨려 무역 불균형을 야기했다는 명분이 동원됐다.
최근 미중 무역전쟁 양상은 34년 전 일본의 팔을 비틀어 엔화 가치를 끌어올린 플라자합의 상황과 비슷하다. 지난해 미국의 전체 무역적자는 6,210억달러로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최대치를 기록했다. 이 가운데 대중 무역적자가 4,192억달러로 전체의 67%를 차지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고율 관세 압박을 내세운 무역전쟁에도 불구하고 대중 무역적자가 줄어들기는커녕 되레 전년 대비 11.6%나 급증하자 위안화 환율을 문제 삼을 기세다.
실제로 세계 최강국 도약을 목표로 중국몽(中國夢)을 꿈꾸는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중국 지도부는 트럼프의 최근 여러 대중 압박 행보가 신플라자합의를 염두에 둔 것이 아닌지 걱정하고 있다. 신플라자합의에 대한 중국의 우려는 지난 3월19일 중국에서 열린 중일 친선 심포지엄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중국 인민대회우호협회와 일본 사사카와재단이 연 심포지엄에서 중국 학자와 전직 관료들은 일본 전문가들에게 미중 통상 협상 타결의 지연이 행여나 신플라자합의로 이어질 가능성이 없는지 조언을 구했다고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는 전했다. 이 자리에서 중국 경제 석학들은 트럼프 행정부의 대중 요구 사항이 34년 전 미일 통상 갈등 상황과 비슷하다는 판단 아래 위안화 평가 절하를 문제 삼고 있는 미국의 압박이 신플라자합의 종용으로 치달을 경우 중국이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집중적으로 물었다고 한다. 화성 난징 둥난대 명예교수는 중국 주요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플라자합의에 따른 일본 경제 침체는 중국에 큰 경고의 메시지를 주고 있다”면서 “엔화 절상으로 인한 일본 경제의 장기 침체 역사를 중국이 참고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순순히 항복하지 않겠다” 中의 반격=지난달 28일 미국 재무부가 내놓은 반기 환율 보고서에서 중국은 환율조작국 지정은 일단 피했지만 그다지 안심할 상황은 아니다. 미국은 1일부터 2,000억달러 규모의 중국산 수입품에 대한 관세율을 기존 10%에서 25%로 올렸다. 트럼프의 지시를 받은 미국무역대표부(USTR)는 중국산 수입품 중 고율관세를 적용받지 않는 나머지 3,000억달러 규모의 품목에 대해서도 25%의 관세를 적용하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이에 대응해 중국은 1일부터 600억달러 규모의 미국산 제품에 5~25%의 보복 관세를 부과하기로 했고 2일에는 미국 운송업체 페덱스의 화웨이 화물배송 사고를 꼬투리 잡아 반격에 나섰다. 페덱스가 일본에서 중국 화웨이 측으로 보내야 할 화물 두 개를 미국 페덱스 본사로 잘못 보낸 것을 문제 삼아 중국 당국이 조사에 나서기로 한 것이다. 이는 중국 최대 스마트폰·통신기술업체 화웨이에 대한 미국의 압박에 대응하는 중국 당국의 보복 공세 성격이 짙다. 중국은 자국 기업의 권익을 침해하는 외국 기업 명단인 블랙리스트까지 작성하겠다고 밝혔다. 호락호락 미국의 요구에 두 손 들지 않겠다는 뜻이다.
여기에는 최근 중국의 위상이 1985년 플라자합의 때의 일본과는 다르다는 판단도 작용하고 있다. 이미 중국은 2010년 GDP 기준 일본을 제치고 세계 2위의 경제 대국으로 도약했다. 미국 신경제 산업에 타격을 줄 수 있는 희토류의 대미 수출 발목을 묶어 무역전쟁의 무기로 활용할 수도 있다. 희토류는 반도체나 스마트폰, 스텔스 전투기 등 첨단제품 생산에 필수적인 물질이다. 미국 지질조사국(USGS)에 따르면 중국은 2002년부터 2013년까지 세계 희토류 생산량의 90% 이상을 차지했고 미국은 희토류의 80%가량을 중국에서 사들이고 있다.
희토류의 무기화 효과는 이미 2010년 일본과의 남중국해 센카쿠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釣魚島) 분쟁에서 확인된 터라 미국이 이를 무시하기가 어렵다는 점을 중국도 잘 알고 있다. 시 주석이 지난달 20일 이례적으로 장시성 간저우의 희토류 생산 공장을 시찰한 것은 대미 무역전쟁에서 희토류 카드를 꺼낼 수 있다는 노골적인 엄포나 다름없다. 지난달 말 주일 중국대사로 부임한 쿵쉬안유 전 중국 외교부 부부장은 부임 전 인터뷰에서 “세계는 30년 전과 다르고 중국도 미국과 플라자합의를 했던 일본과는 다르다”면서 일방적인 양보로 미중 무역 문제가 해소되지는 않는다는 입장을 전했다.
◇‘달러당 7위안 마지노선 넘어설까’ 긴장하는 세계 금융시장=글로벌 금융시장에서는 미중 무역전쟁의 포성이 커지면서 최근 들어 치솟고 있는 달러당 위안화 환율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중국과 미국이 마지노선으로 여기고 있는 달러당 7위안을 상향 돌파할 경우 미중 갈등은 걷잡을 수 없는 환율전쟁으로 치달을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글로벌 시장에서는 이미 2016년 하반기와 지난해 말 위안화 환율이 달러당 7위안에 근접하면서 극도의 긴장을 경험한 상태다. 달러 대비 위안화 환율 상승은 가뜩이나 심각한 미국의 대중 무역적자를 더 키울 수도 있다.
위안화 환율이 5월 중순 올 들어 처음으로 6.9위안을 돌파하면서 일부 환율 전문가들은 달러당 7위안 돌파 가능성을 언급하는 분위기다. 위안화 환율이 달러당 7위안을 넘어선 것은 글로벌 금융위기가 발생했던 2008년 5월이 마지막이었다. 달러당 7위안이 돌파되면 글로벌 금융시장은 최근 10여년간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던 혼란이 일어날 수도 있다. 지난해 글로벌 투자은행인 도이체방크는 미중 무역 갈등이 가라앉지 않고 중국 경제를 둘러싼 불확실성이 커지면 올해 말 위안화 환율은 달러당 7.4 위안까지 폭등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전문가들은 이 같은 위안화의 급격한 평가절하는 미국의 분노를 촉발해 ‘트럼플라자’로 불리게 될 신플라자합의에 중국이 내몰릴 수 있다고 관측한다. 일각에서는 이 경우 중국의 저항 강도에 따라 미중 간 물리적 충돌도 배제할 수 없다는 우려를 제기한다. 조철 산업연구원 중국산업연구부장은 “최근 중국 인민일보가 희토류를 통한 대미 반격을 언급하며 최후통첩성 경고 논평을 내놓은 것에 대해 중국 매체들도 적지 않은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면서 “과거 중국의 이 같은 최후통첩성 경고 이후 중국·인도 국경전쟁과 중국·베트남 전쟁, 중국·구소련 분쟁이 터진 점을 주목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양평섭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세계지역연구센터 소장은 “일본의 경험을 지켜본 중국은 사상 초유의 경제적 충격파가 미칠 신플라자합의는 절대적으로 피하고 싶어 한다”면서 “이달 말 일본 오사카에서 열리는 주요20개국(G20) 정상회의에 앞서 중국은 양국 무역 갈등을 관세전쟁 수준에서 봉합하고 환율전쟁으로 가는 것을 피하기 위해 총력전을 펼칠 것”이라고 진단했다./홍병문 논설위원 hbm@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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