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렵다 정도가 아니라 이제 끝이지예.”
경남 창원에서 원자로 부품 제조업체을 운영하고 있는 이신우(가명) 대표는 18일 기자가 “요새 사정이 어떠냐”고 묻자 이같이 말하며 한숨부터 내쉬었다. 국내 마지막 원전인 신고리 5·6호기에 대한 부품납품을 이달 마치면 일감이 더는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직원 인건비에 이자비용 등 공장을 한 달 유지하는 데만 6,000만~7,000만원이 들지만 더 이상 감당하기 힘든 처지다. 은행은 사업 비전이 없다며 추가 대출을 거부하고 있다.
이 대표는 “원전 바닥에서만 50년 가까운 세월을 보냈다”며 “신한울 3·4호기라도 예정대로 건설되면 다른 길을 모색할 시간이라도 벌 수 있는데, 이제 그럴 가망이 없다”고 했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2017년 6월19일 탈원전 선언을 한 후 달라진 원전 산업계의 씁쓸한 풍경이다. 탈원전 선언 2년 동안 무엇이 달라졌을까.
◇원전 납품 인증서 발급 포기 속출=최근 원전 부품 업체들 사이에서 발생하는 기현상 중 하나는 전력산업기술기준(KEPIC) 인증서를 갱신하지 않는 업체가 늘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수력원자력이나 두산중공업 등에 원전 부품을 납품하려면 3년마다 5,000만원 정도의 비용을 내고 이 인증서를 갱신해야 하는데 이 비용마저 부담스럽다는 이유에서다. 원전 업계의 한 관계자는 “사실상 원전 사업을 접었다고 보면 된다”고 설명했다. 부산 소재의 한 원전 부품 업체 대표도 “9월에 신고리 5·6호기 물량 납품이 완료되면 법정관리를 신청하거나 회사를 정리하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고 전했다. 원전 부품 업체 대표들에게 이제 정치권이나 정부 관계자, 기자들에게 어려운 사정을 알리는 일은 일상이 됐다. 창원에 위치한 한 원전 부품 임가공 업체의 김진수(가명) 대표는 “하루 이틀 얘기한 것도 아니고 여러 경로로 어려움을 호소해왔다”며 “이제는 우리 이야기가 저 윗사람들의 귀에 들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나니 이만저만 속상한 게 아니다”라고 푸념했다.
◇싼 원전 두고 비싼 LNG 늘리니 ‘적자 수렁’=지난달 발표된 한국전력의 올 1·4분기 영업손실 규모는 6,299억원으로 국내 증권사들이 예측한 컨센서스 1,285억원의 5배에 달했다. 지난해 6년 만에 적자로 전환한 데 이은 충격적인 실적 악화였다. 원전 운영사인 한수원도 원전 부품 비리 사건으로 일부 원전의 가동을 중단한 2013년 이후 5년 만에 처음으로 지난해 당기순손실을 기록했다. 이에 대해 정부는 “탈원전 정책의 영향은 아니다”라고 강변하지만 공교롭게 문 대통령의 탈원전 정책 이후에 벌어진 일들이다. 이덕환 서강대 화학·과학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는 “폐렴 환자에게 폐렴(탈원전)은 문제가 아니고 고열(연료비 상승)만 문제라고 하는 격”이라며 “탈원전 정책 이후 각종 이유를 대며 원전 가동을 멈춰 원전 이용률이 떨어지자 단가가 비싼 액화천연가스(LNG)발전을 늘리면서 발생한 일”이라고 꼬집었다. 이미 4,927억원을 투입해 신한울 3·4호기의 원자로 설비와 터빈발전기 등 주기기를 제작한 두산중공업은 한수원 이사회의 의결 없는 신한울 3·4호기 건설 백지화로 보상 논의를 진행하지도 못 하고 있다.
원전 수출 전선에도 비상등이 켜졌다. 아랍에미리트(UAE)가 발주한 바라카 원전 장기정비계약(LTMA)은 당초 한국이 수의계약이나 경쟁입찰을 통해 통수주할 것으로 예상됐지만 현재까지의 상황을 보면 ‘단독 수주’는 물 건너간 상황이다.
◇업계·학계에서는 인재 떠나고…원전 전문가 대신 환경단체 출신이 요직 점령=산업 생태계가 어려워지는 동안 인력 이탈 문제도 심각하다. 정유섭 자유한국당 의원실에 따르면 한수원·한전기술·한전KPS 등 원전 공기업 3사의 자발적 퇴직자(정년퇴직 등 제외)는 2015년 78명에서 2017년 121명, 2018년 144명으로 증가했다. 2017~2018년 한수원과 한전기술 퇴직자 중 최소 14명은 UAE 원전 관련 업체로 이직했다. 원전 핵심 기자재를 제조하는 민간기업 두산중공업도 2017~2018년 원전 인력 80여명이 회사를 나왔다. 학교에서도 학생들이 떠나고 있다. 한국원자력학회가 최근 원자력 관련 학과가 있는 전국 18개 대학의 실태를 조사한 결과 학업을 중도 포기한 학생은 2016년 39명에서 지난해 56명으로 증가했다. 지난해 부산대와 세종대는 원자력시스템 전공 등의 박사과정 지원자를 단 한 명도 받지 못했다.
원전 전문가들이 있던 자리는 환경단체나 다른 분야 전문가들로 물갈이됐다. 총 9명으로 구성되는 원자력안전위원회에는 현재 5명의 위원만 있는데 이 중 원자력 전공자는 한 명도 없다. 위원장은 사회복지학을 전공했고 위원들은 탈핵 운동을 했던 민변 회장, 예방의학 전공의대 교수 등으로 구성돼 있다. 원자력 홍보를 위해 설립된 한국원자력문화재단은 이번 정부 들어 한국에너지정보문화재단으로 이름을 바꾸고 탈원전 정책을 홍보하고 있다. 현재 재단 대표인 상임이사는 시민단체 녹색연합에서 탈원전을 주장했던 윤기돈씨가, 비상임 이사장도 탈원전론자인 윤순진 서울대 환경대학원 교수가 맡고 있다.
/세종=강광우·김우보기자 pressk@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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