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백남준은 결혼할 생각이 없는 남자였다. 여자를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스무 살 시절, 도쿄대학 재학 중에 만난 시부사와 미치코를 혼자 흠모한 첫사랑도 있었으니까. 하지만 독일로 건너가 전혀 새로운 음악과 미술에 빠져들면서부터 백남준은 항상 예술이 먼저였다. 결혼 같은 것은, 생각할 틈이 없었다.
백남준이 당대 서울 최고 갑부의 막내 아들로 태어나 일찍이 피아노를 배우고 홍콩·일본을 거쳐 독일에서 전위적인 예술세계에 빠져들 무렵, 일본에서는 구보다 시게코(1937~2015)라는 젊은 여성이 시대에 대한 반항심을 속으로 삭이고 있었다.
일본 니가타현 출신의 구보다는 묵화(墨畵) 화가였던 외할아버지의 재능을 물려받았다. 고등학교 교장이던 아버지가 딸을 위해 실력 있는 미술교사를 수소문해 왔다. 니가타대학 미대 교수를 과외선생으로 붙여주었다. 그 교수의 권유로 전국 규모 미술 공모전에 출품해 17세 나이로 입선하기도 했다. 구보다는 오늘날 스쿠바대학의 전신인 도쿄교육대학 조소과에 입학했다. 공부도 잘 했고 조형감각도 좋았으나 판에 박힌 수업방식이 싫어 반항하는 일이 잦았다. 저항의식과 문제의식이 뚜렷했던 그는 ‘반미 안보투쟁’을 벌이는 극렬 운동권 학생이 됐다. 1960년 6월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이 방일했을 때는 하네다공항을 점거했다. 요철 많은 학교생활을 마치고 중학교 미술교사가 됐건만 구보다는 보수적인 일본사회가 여전히 답답하기만 했다. 예술만이 그녀의 숨통을 틔워주었다.
1963년 6월 초의 어느 날 아침. 졸린 눈을 비비며 대문 앞에서 집어든 ‘요미우리 신문’에서 처음 본 그 남자의 살짝 치켜뜬 눈매의 영민한 첫인상을, 구보다는 죽는 날까지 기억했다. ‘파괴의 아름다움’이라는 제목의 기사는 독일에서 활약하던 백남준이 일본으로 왔고 전위적이며 파괴적인 공연을 시작했다는 내용이었다. 스스로 ‘황색 재앙’이라 부르며 관객들 앞에서 엉덩이 까는 일도 서슴지 않은 백남준의 전복적인 행위를 묘사한 글을 읽어내려가던 구보다는 우수에 젖은 깊은 눈매와 부스스한 머리의 비쩍 마른 몸매의 남자가 뿜어내는 고독이 더 눈에 띄었다. 그녀는 기사를 자신의 방 벽에 붙여놓고 매일같이 사진을 들여다봤다. 기존 질서를 가뿐히 박살 내버리는 백남준은 구보다의 선망과 짝사랑이 됐다.
구보다는 혼자 속 앓이 하는 여자가 아니었다. 정성껏 쓴 연애편지를, 팬레터 명목으로 세 통이나 보냈다. 교사생활을 하며 1964년 초 도쿄 나이쿠아갤러리에서 연 구보다의 첫 개인전 제목도 ‘연애편지’였다. 구겨진 신문지를 산처럼 쌓아놓고 흰 천을 덮은 다음 그 위에 청동 조각을 설치했다. 이런 설치작품은 당시 일본에서 거의 시도되지 않은 파격이었다. 자신의 연애편지처럼, 이 작품도 답장을 얻지 못했다. 평론 한 쪽, 기사 한 줄 나지 않았고 사석에서 혹평만 들었다. 그렇게 구보다는 자신의 기질과 백남준에 대한 연모가 뒤섞여 전위적인 예술사조인 다다이즘(Dadaism)과 플럭서스(Fluxus)운동에 빠져들고 있었다.
1964년 5월 29일, 마침내 구보다는 백남준을 만나게 된다. 도쿄 쇼게츠홀에서 백남준의 공연이 열렸다. 백남준은 달걀을 벽에 던지고 피아노를 대패로 갈더니 도끼로 때려 부쉈다. 신고 있던 고린내 나는 가죽구두에 물을 따라 벌컥벌컥 마시는 엽기행각으로 관객들은 실신 지경이 됐다. 몰래 밖으로 빠져나간 백남준이 공연장 안으로 전화를 걸어 “공연이 끝났다”고 한 뒤에야 비로소 사람들은 주섬주섬 자신의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이 와중에 구보다는 정신을 바짝 차렸다. 그는 마치 BTS를 지지하는 아미처럼 친구 예닐곱 명을 데리고 무대 뒤편으로 가 백남준에게 ‘차 한잔 하자’고 청했다. 공연장 뒷정리 후 찻집으로 온 백남준은 구보다가 꿈에 그리던 이상형, 그 자체였다.
게다가 백남준은 “올 초 나이쿠아갤러리에서 개인전을 한 그 구보다가 맞느냐”며 “작품이 아주 창의적이고 독특해서 좋았다”고 칭찬의 말을 건넸다. “일본여자들은 대개 아주 작고 섬세한 작품을 하던데 당신 것은 독특하게도 스케일이 큰 대륙적인 작품”이라며 “당신은 일본 여자보다는 중국 여자 같은 면이 있는 것 같다”는 세심한 평도 잊지 않았다. 구보다는 이날 들은 찬사를 자신의 ‘연애편지’가 받은 답장으로 평생 여기고 살았다.
이렇게 둘은 영영 헤어질 뻔했다. 백남준은 이 공연 후 미국 뉴욕으로 갔다. 1961년 독일에서 했던 음악극 ‘오리지날(The Original·오리지날레)’을 그해 뉴욕 아방가르드 페스티발에서 공연해 달라는 샬럿 무어맨의 제안을 받았기 때문이다.
구보다는 적극적인 여자였다. 백남준이 뉴욕으로 떠난 사실을 풍문으로 듣고 뉴욕행을 결심한다. 당시 일본 내에서도 플럭서스 운동이 꿈틀대고 있었고 구보다는 ‘플럭서스 동지’로 오노 요코와 교류했다. 오노가 뉴욕 플럭서스 본부를 이끌고 있는 조지 마키우나스에게 구보다를 소개했다. 마키우나스가 ‘뉴욕에서 플럭서스 콘서트를 열 계획이니 동참하라’는 초대장을 보냈다. 구보다는 만류하는 가족들에게 “나중에 내가 결혼할 때 쓰려고 떼어놓은 돈을 지금 달라”며 고집을 부렸고 1964년 7월 4일 뉴욕행 비행기에 올라탔다.
뉴욕 커낼가(Cacal St.) 359번지에 있는 플럭서스 본부에서 쿠보다는 백남준을 다시 만났다. 백남준은 미국 자본주의를 배경으로 현대미술의 심장부로 부상한 뉴욕에 터를 잡기로 결심했고, 구보다는 맨해튼의 고급 일식당 웨이트리스 등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며 그의 곁에 남기로 했다.
백남준은 쉽게 손에 움켜쥘 수 있는 남자가 아니었다. 늘 동료작가들과 평론가들 사이에서 예술을 이야기하기 바빴다. 구보다는 사적인 관계를 만들고 싶었으나, 단둘이 있을 시간조차 나지 않았다. 친한 동료 그 이상은 결코 아니었다. 구보다는 1965년 7월 4일 워싱턴 스퀘어파크 근처에서 열린 플럭서스 공연에서 ‘버자이너 페인팅’을 공연한다. 짧은 치마를 입고 사타구니에 붓을 꽂고, 흰 종이 위를 쪼그려 앉아 걸어 다니며, 핏빛 붉은 물감으로 그림을 그렸다. 혹평이 빗발쳤지만 구보다는 단숨에 전위예술가로 이름을 알렸다. 이 공연에 대해 구보다는 백남준 사후 출간된 자서전 ‘나의 사랑 백남준’(구보다 시게코·남정호 지음, 아르테 펴냄)에서 “실은 남준의 기획으로 이뤄진 공연이었다”고 밝혔다.
그렇게 구보다는 노력했다. “이 사람은 한 세기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천재이며 곧 세상의 전설이 될 것”이라는 첫 만남에서의 직감을 믿었기에 백남준 곁을 맴돌았다. 하지만 돌부처 같은 백남준은 넘어오지 않았다. 오히려 하버드대학을 졸업한 유대인 작곡가 데이비드 베어먼이 구보다에게 호감을 보여 구애했다. 갈등하던 구보다는 초강수를 두었다.
“데이비드가 결혼해 달라고 하는데, 어떻게 할까?”
“그래, 데이비드와 결혼해. 난 결혼 같은 것과 맞지 않는 사람이야.”
무심한 남자 때문에 화도 났다. 구보다는 데이비드와 결혼했다. 3년을 넘기지 못했다. 이혼하고는 당장 캘리포니아 예술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던 백남준에게로 날아갔다. 태양 주변을 도는 행성 같은 구보다의 삶이 다시 시작됐다. 그 시절 백남준의 단짝은 단연 샬럿 무어맨이었다. 무어맨이 유부녀였음에도 구보다는 “벌거벗은 샬럿이 나오는 남준의 공연에 대해 적개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는 마음을 숨기지 않았다. 그래도 꾹 참았다. 자신도 작가지만 때로는 백남준의 작품 조언자로, 전시 기획자로, 협력하는 동지이자 따끔한 비평가로 십수 년을 함께했다.
마흔이 다가오자 구보다는 문득 “뛰어나고 재능있는 남자가 자신의 유전자를 물려줄 2세도 없이 살다 간다는 건 너무 아깝다”는 생각에 백남준의 아이를 낳아야겠다고 결심했다. 결혼 생각이 없는 남자가 자식 생각이 있을 리 만무하기에 백남준에게 물어보지 않았다. 마음 한켠에는 아이를 낳아 백남준을 붙잡고 싶기도 했다. 6개월 정도 노력해도 아이가 생기지 않으니 이상했다. 혼자 병원에 찾아갔다. 청천벽력 같은 자궁암 진단을 받았다. 임신은커녕 당장 자궁적출수술을 받아야 했다. 가난한 일본인 작가에게 미국 병원 수술비는 과하게 비쌌다. 고향의 가족들도 돌아오라고 했다. 조용히 짐을 싸던 날, 백남준이 다가왔다.
“시게코. 우리 결혼하자, 당장.”
구보다는 ‘결혼 퍼포먼스를 하려는가’ 싶었다고 한다.
“방송국에서 일할 때 들었던 보험이 있어. 나와 결혼해서 아내 자격으로 수술을 받으면 보험으로 치료비를 댈 수 있어.”
구보다는 그냥 가겠다고 했다. 이제 애도 못 낳게 됐으니 더욱 결혼할 자격이 없다고도 했다.
“괜찮아. 난 아이 가질 생각이 없어. 예술 하고 작품 만드는 데만도 시간이 모자랄 지경이야. 그리고 나 닮은 아이가 태어나면 골치만 아프지.”
1977년3월21일. 백남준과 구보다는 뉴욕시청에서 결혼서약을 했다. 백남준의 부탁으로 시각장애인 작곡가인 필립이 결혼 증인을 서 주었다. 세 사람은 차이나타운의 중국집 ‘456’에서 조촐한 피로연처럼 같이 밥을 먹었다. 그 와중에 백남준은 “우리가 77년3월21일에 결혼해서 ‘456’에서 저녁을 먹고 있으니 1부터 7까지 숫자가 다 있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이후 둘은 여생을 함께했다. 백남준이 35년 만에 고국 땅을 밟던 1984년의 방한 길에도 구보다가 따라나섰다. 백남준이 1996년 뇌졸중으로 쓰러진 후에도 구보다는 절대 다른 사람에게 백남준을 맡기지 않았다. 이따금씩 악처인 적 있었지만 대단한 사랑이었다. 그는 투병 중이던 백남준이 2003년 3월 28일 마이애미의 자택에서 그려준 편지드로잉을 무척 아꼈다.
‘1.위대한 부인이고/ 2.위대한 요리사이고/ 3.위대한 간호사이고/ 4.위대한 작가이고…그리고 이런 내용이 100페이지는 더 계속되는/ 구보타 시게코를 나는 사랑하고 존경한다.’
구보다는 백남준과 함께 살던 뉴욕의 집을 지키며 살다가 홀로 세상을 떠났다.
/조상인기자 ccsi@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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