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레리나에게 가벼운 몸무게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이다. 한 발로 서는 동작이 많은 만큼 체중이 늘면 발에 가해지는 압력도 높아져 부상당하기 쉽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체력 관리와 근육량을 늘리기 위해 아침 식사는 무조건 고기반찬, 연습이 끝난 뒤에는 주요리 두 개를 먹어야 한다. 일반인보다 훨씬 더 많이 먹고도 훅 불면 날아갈 듯한 몸매를 유지하려면 입에 단내가 나도록 훈련해야 한다. 일과가 끝난 뒤에도 외부 공연 연습을 하거나 필라테스 등 다른 운동으로 유연성과 호흡량을 늘린다. 가끔은 TV를 보다 화장실에 들어가 표정연습을 하기도 한다. 한층 깊어진 연기력으로 지난해 유니버설발레단(UBC) 수석무용수로 승급한 홍향기(30) 발레리나의 일상이다.
여성이 중심인 서사가 많은 발레에서 발레리나는 우아한 동작과 가녀린 몸짓으로 무대를 이끌어간다. 때로는 화려하게, 때로는 천상에서 내려온 듯 보이는 발레리나의 이면을 홍향기를 통해 들여다봤다. 그는 오는 19일 서울 중구 충무아트센터에서 열리는 ‘지젤’ 공연에서 주연을 맡았다.
지난 11일 오전 11시 서울 광진구 유니버설아트센터 B 스튜디오. ‘레이디클래스’ 시작 30분 전부터 30여명의 발레리나들이 몸을 푸느라 분주한 모습이었다. 섬세한 감정 표현이 중요하기에 ‘레이디클래스’는 폴드 브라(팔 동작) 위주로 운영된다. 바를 잡고 가벼운 동작으로 시작해 점프동작으로 끝나는 클래스에 무용수들 이마에는 땀이 맺힌다.
클래스가 끝나자마자 홍향기는 ‘주역 리허설’을 위해 급하게 스튜디오 A로 이동했다. 2시간가량의 연습에서 중점을 두는 부분은 연기력이다. ‘지젤’에서 파트너 이동탁이 맡은 귀족 청년 알브레히트는 다른 여인과의 약혼 사실을 숨기고 지젤과 사랑에 빠지는 인물이다. 연기에 따라 알브레히트는 나쁜 남자가 되기도, 비운의 주인공이 되기도, 멍청한 남자가 되기도 한다. 홍향기는 연기력을 살리기 위해 “거울 보고 세수하다가도 혼자 표정 지어보고 드라마 여주인공을 따라 해 보기도 한다”고 말했다. 발을 뻗는 속도부터 표정이나 공중 체류 시간, 음악 등을 어떻게 할지 고민하며 파트너와 호흡을 맞춘다.
체중은 연기만큼이나 발레리나가 신경 쓰는 부분이다. 발레단 전체 연습까지 마치고 연습실을 나오면 저녁 7시는 돼야 식사를 할 수 있다. 홍향기는 “연습 중에 식사하면 몸이 부대낀다”며 “아침부터 고기반찬으로 시작해 퇴근 후에는 요리 두 개 이상을 먹어야 한다. 물냉면과 왕만두 한 대접을 혼자 다 먹은 게 최근 가장 뿌듯한 식사”라고 말했다. 그는 “발레리나는 이슬만 먹고살 것 같다는 말을 하는데 전혀 사실이 아니다”며 “오히려 중학교 때부터 군것질 때문에 발레학과 쓰레기통이 제일 빨리 찬다”고 웃었다.
많이 먹지만 평소 운동량 자체가 워낙 많아서 살이 잘 찌지 않는다고 한다. 하지만 여행 등의 이유로 연습이 없을 때는 몸무게가 급속도로 불어나기 때문에 하루 한 끼로만 때우고 반신욕을 병행한다. 그는 “체중이 많으면 무게가 한쪽으로 쏠릴 때 다치기 쉽다”며 “발레리노도 발레리나가 가벼울수록 다채로운 자세를 취하기 쉬워진다”고 설명했다. 홍향기는 “근육 자체에 무리가 가니 술로 스트레스를 풀 수 없는 게 아쉽다”며 “주 6일 연습을 소화하기 위해 하루에 8시간은 잔다. 일정이 없는 날에는 마사지 받는다”고 했다.
중력과 싸우는 예술, 발레를 계속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는 “희로애락을 무대에 녹일 수 있는 점이 좋다”며 “나이가 들고 경험이 쌓일수록 연기가 느는 게 느껴진다. 지젤역에서 어려웠던 사랑의 표현도 이제 서슴없이 나오더라. 그런 부분이 좋다”고 말했다. 이어 “아름답고 다양한 모습을 많이 보여줄 수 있는 것이 발레리나의 장점”이라며 “공주가 되기도 하고 요정이 되기도 한다. 이번에는 지고지순한 귀신”이라며 웃었다.
/한민구기자 1min9@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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