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원이 자본시장법 위반 혐의를 받는 김태한 삼성바이오로직스(207940) 대표에 대한 구속영장을 기각하면서 삼성바이오가 최고경영자(CEO) 공백이라는 최악의 상황를 일단 벗어났다. 하지만 일본의 무역보복으로 바이오의약품 생산에 쓰이는 핵심 소재의 수급에 차질이 예상되고 있어 내우외환의 위기에 내몰렸다는 분석이 나온다.
20일 업계에 따르면 삼성바이오는 최근 일본이 무역보복의 일환으로 한국을 수출 우대국인 ‘화이트리스트’에서 제외할 움직임을 보이자 긴급 임원회의를 개최하고 대책 마련에 돌입했다. 일본이 예정대로 한국을 화이트리스트에서 배제할 경우 당장 수급에 차질이 예상되는 제품은 바이오의약품 생산에 쓰이는 ‘바이러스 필터’다.
바이러스 필터는 바이오의약품을 제조할 때 바이러스와 같은 불순물을 걸러주는 필수 소재 중 하나다. 일본과 유럽 등 주요 선진국에서 생산하고 있지만 국내에서는 상용화에 성공한 기업이 사실상 전무한 것으로 알려졌다. 인체에 투약하는 바이오의약품의 제조에 쓰이는 소재인 만큼 상당한 기술력을 요구한다는 게 업계의 설명이다.
일본산 바이러스 필터 수입이 차질을 빚을 경우 유럽산으로 대체할 수 있지만 삼성바이오는 선택지가 없다. 바이오의약품 위탁생산(CMO) 전문기업인 탓에 고객사가 사전에 정한 부품과 소재를 제조공정에 사용해야 하기 때문이다. 반면 셀트리온은 일본산이 아닌 바이러스 필터를 채택해 일본의 화이트리스트 배제와 관련해 별다른 영향이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삼성바이오로직스 관계자는 “바이러스 필터는 바이오의약품 제조에 필수적으로 쓰이는 핵심 소재 중 하나”라며 “현재 물량 확보에 주력하고 있지만 일본이 한국을 화이트리스트 국가에서 배제하면 현재 평균 2~3주 정도 걸리는 공급기간이 최소 3개월 이상으로 늘어나 생산 차질이 예상된다”고 말했다.
이론적으로는 삼성바이오가 바이오의약품 생산을 맡긴 고객사와의 협의를 통해 일본산 바이러스 필터를 유럽산으로 대체할 수 있다. 하지만 이 경우 제조공정에 쓰이는 소재가 바뀌는 만큼 미국 식품의약국(FDA)이나 유럽의약품청(EMA)으로부터 새로 우수의약품제조관리기준(GMP) 인증을 다시 받아야 한다. 짧게는 수개월에는 길게는 1년 이상 걸리는 GMP 인증을 획득할 때까지 해당 바이오의약품의 생산을 중단해야 한다는 의미다.
다른 산업군도 마찬가지이지만 의약품 제조공장의 경쟁력은 완성된 제품의 품질 수준도 우수해야 하지만 얼마나 적재적소에 생산과 공급을 할 수 있느냐도 중요하다. 사람의 생명과 직결되는 제품이기 때문에 생산 차질로 제때 공급이 되지 않으면 인적 피해로 이어질 수 있어서다. 주요 글로벌 제약사가 CMO 전문기업과 의약품 생산계약을 체결할 때 가장 중요하게 보는 것도 이 부분이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임직원들이 분식회계에 관여했다는 의혹으로 연일 검찰 수사를 받고 있는 상황에서 일본의 무역보복이라는 악재까지 겹치면서 삼성바이오가 창사 이래 최악의 시기를 보내고 있다”며 “삼성바이오가 부품 수급의 차질로 고객사가 맡긴 바이오의약품을 정상적으로 납품하지 못하면 기존 계약에 대한 신뢰도까지 추락해 전방위적인 수주 차질로 이어질 수도 있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이지성기자 engine@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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