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에게:::::: 지난 8년간 네가 나를 위해 한 모든 일과, 특히 지난번 보니노 씨와의 논의에서 있었던 너의 활약에 진심으로 감사해. 클라라 슈만과 브람스가 현대인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것처럼 훗날의 역사는 우리에 대해서도 상상의 나래를 펴겠지, 하하하. 내가 너무 잘난 척했나…”
백남준의 편지를 받는 이는 독일의 현대예술가 마리 바우어마이스터(85)이다. 작곡을 전공한 음악가 백남준이 독일로 가 행위예술가로 이름을 떨치게 한 ‘괴짜들(원어명 Originale·일명 ‘오리기날레’)의 작곡가 칼하인츠 슈톡하우젠(1928~2007)의 부인이기도 했던 현대미술가다.
동료이며 동시에 존경하는 선배 예술가의 아내인 바우어마이스터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백남준은 클라라 슈만(1819~1896)과 요하네스 브람스(1833~1897)의 얘기에 자신들을 빗댔다. 슈만과 그의 제자인 브람스, 클라라를 둘러싼 ‘삼각관계’는 명확하게 알려진 게 없기에 지금도 숱한 상상의 나래를 펼치게 한다. 분명한 것은 클라라 슈만이 슈만과 브람스 음악의 해석자로 특히 유명하다는 사실이다.
백남준은 겸연쩍게 웃어버렸지만 바우어마이스터와의 끈끈했던 관계와 평생 이어진 교류가 ‘친구와 연인 사이’의 어디쯤이었는지는 지금도 모호하다.
백남준은 ‘아놀드 쇤베르크 연구’라는 논문을 쓰고 1956년 동경대를 졸업한 후 인도의 캘거타와 이집트의 카이로를 경유해 독일로 갔다. 그때까지만 해도 백남준의 지향점은 음악가인 듯했다. 독일 생활 2년 차에 접어든 1957년 여름, 그는 당시 전위예술의 핵심 지역이던 다름슈타트에서 열린 ‘국제현대음악 하기강좌’에 참여했다. 당시 백남준이 접한 최신의 현대음악은 ‘음악을 넘어선 음악’이었다.
스물 다섯 살의 백남준은 연사로 참석한 슈톡하우젠을 만났다. 슈톡하우젠은 현대음악 작곡가이면서 기존 클래식 음악의 개념을 확장해 새로운 가능성을 열었던 천재 음악가였다. 그 여름의 만남은 백남준의 예술세계에 ‘지진’을 일으켰다. 이듬해 또 참석한 다름슈타트의 국제현대음악 하기강좌에서는 음악을 소리의 개념으로까지 확장 시킨 존 케이지(1912~1992)를 만났다. 백남준은 존 케이지를 자신의 스승이라 칭했다. 이때부터 백남준은 기존 음악에 대한 ‘전복’에 몰두했다. 그는 쾰른으로 옮겨가 쾰른대학에서 공부하며 슈톡하우젠이 작업하던 서독방송(WDR·Westdeutsche Rundfunk)의 전자음악스튜디오에 들어가 전자음악 연구를 시작한다.
그 과정에서 만난 이가 바로 마리 바우어마이스터였다. 그는 일찍이 1950년대부터 캔버스를 벗어난 새로운 예술을 추구했고 1960년대 독일 전위예술계에서는 프리마돈나로 통했다. 백남준이 1959년의 어느 날 내뱉은 말을, 바우어마이스터는 지금도 기억하고 있었다.
“나는 슈톡하우젠처럼 훌륭한 음악가가 될 수 없으니 분야를 바꿔야겠어. 나는 화가가 될래, 시각예술을 할 거야.”
백남준이 그해 11월 뮌헨의 갤러리22에서 데뷔공연처럼 선보인 ‘존 케이지를 위한 오마주’는 그 공식선언이었다. 이 공연에서 백남준은 피아노를 때려 부쉈다. 백남준의 이름이 수군거리는 입들을 통해 유럽에 퍼지기 시작했다.
백남준이 1960년 3월 쾰른에서 ‘존 케이지를 위한 오마주’를 재공연한 곳이 바로 ‘마리 바우어마이스터 아틀리에’였다. 이어 10월에는 같은 곳에서 ‘피아노포르테를 위한 연구’를 발표했으니, 제목은 음악적이나 실제 내용은 피아노 2대를 파괴하고 관객들의 넥타이와 셔츠를 자르는 ‘악명’ 높은 퍼포먼스로 역사에 남았다. 그날 백남준은 존 케이지의 넥타이를 가위로 싹둑 잘랐다. 케이지가 소음까지도 음악으로 끌어들였다면, 백남준은 행위 자체를 음악적 소재로 사용해 ‘총체예술’을 시도한 동시에 전통적인 연주회에 대한 개념 자체를 박살 내버렸다.
자신의 작업실을 공연장으로 내 준 일화에서 바우어마이스터가 백남준을 얼마나 신뢰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슈톡하우젠이 음악을 작곡한, 음악적 연극인 ‘괴짜들(Originale·오리기날레)’의 등장인물 18명 중 하나인 ‘괴짜 화가’ 역으로 백남준이 참여했다. 사실 이 작품은 바우어마이스터가 슈톡하우젠과 핀란드에 머물렀을 때 함께 구상한 작품이다. 1961년 10월26일 쾰른에서 초연한 ‘괴짜들’의 무대에서 백남준은 머리칼에 먹물을 묻히고 바닥을 기며 그림을 그리는 ‘머리를 위한 선(禪)’을 처음 선보였다. 따져보면, 백남준 예술의 초기인 독일 시절의 주요작 뒤에는 항상 바우어마이스터가 있었다.
지금이야 유명세가 역전됐지만 그때만 해도 바우어마이스터는 ‘뜨는 별’이었다. 그는 1962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의 시립미술관인 스테델릭미술관에 초대돼 전시를 열었다. 그때 미술관 내 다른 전시장에서는 미국미술전이 열리고 있었다. 로버트 라우센버그(1925~2008)가 박제된 염소 허리에 고무타이어를 끼운 ‘모노그램’ 등의 작품이 선보인 자리였다. 참신했다.
바우어마이스터는 “라우센버그의 ‘염소’가 예술이라고 인정받는 곳, (백남준은) 그곳에 있어야만 했다”면서 “그때 쾰른에 있던 백남준에게 ‘백, 우리가 가야 할 곳을 알았어. 뉴욕이야’라고 적은 전보를 보냈다”고 기억했다. 바우어마이스터는 스테델릭미술관 관장으로부터 받은 자신의 그림값을 뉴욕행 티켓으로 바꿨다. 우연이지만, 스테델릭미술관은 1978년 유럽의 공립미술관 중 처음으로 백남준의 작품을 소장한 곳이다. 바우어마이스터는 뉴욕으로 떠나며 “백, 당신도 꼭 와야만 한다”고 신신당부했다.
이후 백남준은 고향에서 보내준 돈을 탈탈 털어 텔레비전 13대를 구입했고 부퍼탈의 파르나스갤러리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다. 잠시 일본에 머무르며 전자기술을 익힌 후 1964년에 뉴욕으로 갔다. 바우어마이스터는 당시 뉴욕에서 가장 앞서가는 예술제인 ‘뉴욕 아방가르드 페스티벌’을 이끌게 된 무어맨에게 ‘괴짜들’을 들어보라고 권했다. 독일보다는 조금 늦게, 뉴욕에서는 그제서야 막 해프닝과 퍼포먼스 등의 행위예술이 시작되던 터였다. “이 작품을 해봅시다. 퍼포머들을 구해야 하지만 백남준은 대체 불가입니다. 백남준은 꼭 필요합니다.” 바우어마이스터의 제안을 무어맨이 받아들였다.
그동안 바우어마이스터는 유명 갤러리에서 전시를 열었고 시내에 스튜디오를 장만할 정도로 성공을 거뒀다. 그는 자신의 전속 갤러리에 백남준의 전시를 제안했다. 이후 백남준의 개인전을 세 번이나 열었던 ‘보니노 갤러리’였다. 바우어마이스터는 갤러리 대표를 설득하면서 백남준의 1965년 첫 개인전의 도록 제작 비용까지 지불했다. 바우어마이스터는 “내 전시 때는 작품이 팔릴 것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보니노가 도록 비용을 지불했지만 백남준의 경우 확신할 수 없었던 것이고 그래서 내가 지불하겠다고 했다”면서 “그 답례로 백남준은 그의 첫 로봇을 나에게 선물했다”고 말했다.
가슴 부분의 고무 뚜껑이 열리고 똥처럼 콩을 배설하는 로봇이었는데 훗날 백남준의 아내 구보다 시게코가 조심스럽게 “그 로봇은 백남준 작업의 일부인 만큼 마리에게 준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얘기해서 돌려줬다. 바우어마이스터는 “로봇을 받지 않더라도 도록 비용을 지불할 셈이었기에 나는 그냥 돌려줬다”고 했지만 “나중에 그들은 그 로봇을 팔았더라”고 덧붙였다.
바우어마이스터는 독일로 영구 귀국한 1972년 이전까지 수시로 백남준과 편지를 주고 받았다. 독일어와 영어로 적힌 이들 편지는 지난 2015년 말 백남준아트센터의 인터뷰 프로젝트의 일환인 ‘마리 바우어마이스터’라는 번역서로 출간됐다. 앞서 ‘클라라 슈만과 브람스’의 얘기가 적힌 편지도 이 책에 수록돼 있다. 편지에서 백남준은 글자로 모양을 그리거나 이니셜로 말장난을 하는 등 개구쟁이 같은 모습을 가감없이 보여준다.
헐렁한 겉모습과 달리 철저했던 백남준은 보통 먹지를 대고 타이핑한 후 그 사본을 편지로 보내고 원본을 남기는 버릇이 있었다. 단 바우어마이스터에게만은 이따금씩 예외를 보였다. 1967년에 보낸 편지에서 백남준은 “마리, 이번에는 한번 사본 없이 편지를 쓰고 싶어졌어. 말하자면 예술을 위한 예술 또는 편지를 위한 편지인 셈이랄까?”라며 가까운 마음을 털어놓았다. 여기서 백남준은 이렇게도 적었다. “ABC채널에서 아프리카에 대한 4시간짜리 방송을 했어. 내 몸이 세 개여야 했다는 생각이 들어. 하나는 미국에 전자적 방해공작을 가하고, 다른 하나는 인도와 아프리카에서 나의 정체성을 찾고, 세 번째는 한국인 여자와 결혼하도록. 000000000 넌 몸이 몇 개야?” 당시 바우어마이스터는 슈톡하우젠과 결혼해서 율리카와 사이먼이라는 1남 1녀를 두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왜 백남준이 이런 말을 했는지는 둘만이 아는 비밀이다.
백남준은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은 작업 계획도 바우어마이스터에게만 털어놓았다. 1966년에 쓴 편지에 ‘비밀이야’를 강조하며 등장하는 텔레비전 7대로 제작할 ‘TV십자가’ 등이 그렇다. 벨전화연구소의 빌 클뤼버와 뉴욕의 예술가들이 예술과 과학기술의 결합단체로 결성한 E.A.T.를 두고 백남준은 “내가 이 작품을 설치하면 사람들은 누가 누구의 것을 훔쳤는지 알게될 거야. 겉으로는 나와 빌리 크뤼버는 괜찮은 사이인 듯 보이지”라고 편지에 썼다. 이에 대해 바우어마이스터는 “그들은 백남준을 빼고 테크놀로지 전시를 하면서 백남준의 것들을 사용했고, 그래서 배제된 백남준은 도둑맞은 느낌이 들었을 것”이라고 했다.
바우어마이스터가 첫 아이를 임신중이던 1966~67년 사이에 주고 받은 편지에서 이들은 협업을 모색한다. 백남준의 작품이 팔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걱정한 바우어마이스터가 “백남준이 텔레비전을 만들고, 이미 유명해져서 작품들이 좀 팔리는 다른 작가들에게 프레임을 만들어 달라고 하는” 것을 제안했다. 방송이 안 나올 때는 프레임을 감상할 수 있고, 사람들은 벽에 걸어놓을 만한 것이 생기니 작품이 팔리겠다는 생각이었다. 백남준의 편지에 따르면 이 계획에는 독일에서부터 인연을 쌓은 크리스토 자바체프 등의 젊은 작가들이 동의했고, 뉴욕에서 만난 로버트 인디애나, 재스퍼 존스, 제임스 로젠퀴스트 등이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모든 계획이 실현된 것은 아니지만 바우어마이스터와의 협력은 진척된 결과물을 낳았다. 그들은 탁자를 만들되 탁자 윗면을 삼등분 한 가운데 부분이 열리면서 TV가 나오게끔 구상했고, 독일에 있는 바우어마이스터의 작업실에는 한 번도 전시를 통해 공개된 적 없는 그 ‘탁자 TV’가 있다.
/조상인기자 ccsi@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