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의 이번 전략물자 수출입고시 개정 조치는 일본이 닷새 전 시행한 화이트 리스트 개편과 여러모로 닮아 있다. 일본이 한국을 배제한 것처럼 수출 우대국가 명단에서 일본을 배제했지만 반드시 허가를 받아야 하는 개별 품목을 특정하지 않았다. 일본의 조치에 맞대응하는 모양새를 보이면서도 특정 기업을 통해 전처럼 수출할 수 있는 길은 일부 열어둔 것이다.
이를 두고 전문가들은 정부가 일본의 규제 수준에 맞춰 대응 수위를 조절하는 ‘전략적 숨고르기’에 나섰다고 평가했다. 일본이 일으킨 경제보복이 중단된 것이 아닌 만큼 반격의 메시지를 보내면서도 추가 확전을 일단 경계했다는 것이다. 정인교 인하대 교수는 “일단 맞불 기조를 외쳤으니 대응을 하긴 해야 하는데 우리가 일본에게 실질적으로 피해를 줄 수 있는 수단이 많지 않다”며 “사태가 확전될 경우 우리 측 타격이 더 클 수 있는 만큼 신중한 모양새를 취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번 개정으로 일본은 비(非)수출우대국가인 ‘가의 2’로 분류됐다. 일본을 제외한 기존 수출 우대국이 모두 ‘가의 1’에 포함된 것과 대조적이다. 이에 따라 일본으로 전략물자를 수출하는 기업은 원칙적으로 포괄허가를 받을 수 없고 정부로부터 개별 허가를 따내야 한다. 정부가 관리하는 전략물자는 총 1,735개에 달한다.
전략물자는 아니지만 무기 전용 우려가 있는 경우 이뤄지는 상황허가(Catch-All) 규제도 강화된다. 일본으로 수출하는 기업은 무기 제작·개발에 수출 물자가 전용될 것을 인지한 경우와 정부로부터 통보받은 경우 뿐 아니라 의심되는 경우까지 수출심사를 받아야 한다. 우리 정부가 수출을 폭넓게 통제할 수 있는 제도적 기반이 마련됐다는 것이다.
다만 정부는 이번 개정에서 개별허가를 강제하는 품목을 지정하지 않았다. 이 경우 자율준수기업(CP)을 활용하면 개정 전과 마찬가지로 개별허가를 거치지 않고 수출할 수 있다. 정부가 ‘가의2 지역으로 CP기업을 활용해 수출할 경우 동일 구매자에게 2년간 3회 이상 반복 수출해야 한다’는 규정을 두고 있지만, 지금까지 일본 측과 꾸준히 거래해왔다면 수출에 당장 차질이 있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은 내용은 앞서 일본이 시행한 조치와 상당 부분 겹친다. 일본 역시 한국에 대해 △화이트 리스트 배제로 원칙적 포괄허가에서 개별허가로 변경 △CP 기업에 한해 포괄허가 △개별허가 품목 미지정 등을 골자로 하는 수출 규제 방안을 내놓은 바 있다. 정부의 한 관계자는 “사실상 일본에 대응한 조치이기는 하지만 일본이 시행한 조치 이상의 것을 내놓지는 않았다”며 “일본의 향후 대응을 보고 추가 규제 여부를 검토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는 강도 높은 맞대응으로 한일 관계가 파국으로 치닫는 것을 경계한 것으로 보인다. 구체적으로 규제 수위를 크게 높일 경우 한국의 피해가 보다 클 수 있다는 판단이 깔린 것으로 분석된다. 실제 일본의 전체 수입에서 한국산이 차지하는 비중이 크지 않다. 한국무역협회에 따르면 올 상반기 일본의 총 수입액 39조1,321억 엔 중 한국에서 수입한 금액은 1조6,228억 엔으로 4.2%에 그친다. 특히 한국산 의존도가 높은 철강이나 화학 제품은 중국 등 대체 국가를 찾기 어렵지 않다는 지적이 나온다. 상황허가를 활용해 우리가 비교우위에 있는 반도체 수출 등을 제한한다고 한들 도시바, 마이크론 등 업체 제품으로 대체가 가능하다는 점이 문제다. 일본이 최근 한국을 향해 직접적인 수출 규제를 피하는 듯한 모양새를 보이는 점도 고려한 것으로 보인다. 일본이 겉으로 상대국을 향한 공세 수위를 조절하는 과정에서 반격을 하면 갈등의 불씨가 종전보다 훨씬 커질 수 있다. 일본은 예상과 달리 화이트 리스트에서 한국을 배제하면서도 개별허가 품목을 지정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앞서 제한했던 반도체 핵심 소재 가운데 일부에 한해서는 수출을 허용하기도 했다. 한 통상전문가는 “대통령의 광복절 메시지나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 연장 시한 등 한일 관계에 분수령이 될 사안들을 눈앞에 두고 있다”며 “굳이 지금부터 불필요하게 상대를 자극할 필요는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세종=김우보기자 ubo@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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