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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또 정책 ‘쌈짓돈’… 국민연금, 조 단위 ‘克日’ 투자자금 조성 추진

'소재·부품기업에 투자' 한다지만

"연금을 정책자금의 수단화" 비판





국민연금이 또다시 정부의 ‘쌈짓돈’으로 전락할 위기에 처했다. 이번에는 일본의 수출규제에 맞서 국내 소재·부품 산업 육성을 위한 구원투수 역할이다. 한국형 뉴딜(2004년), 해외자원개발 투자(2011년) 등 역대 정권에서 국민연금을 정책자금 수단으로 삼는 것을 두고 비판의 목소리가 컸는데 소재·부품 투자에 대해서도 논란이 거셀 것으로 전망된다.

13일 보건복지부 및 국민연금 기금운용위원회에 따르면 최근 이찬진 기금운용위원(참여연대 집행위원장)이 국민연금기금에 일본 부품·소재 산업을 특정해 투자할 수 있도록 투자 부문을 신설하는 안건을 전체 위원들에게 회람시킨 것으로 확인됐다.

기금위에 제안된 이번 방안의 골자는 국민연금을 통해 이른바 ‘극일(克日)’ 투자자금을 조성하는 것이다. 현재 국민연금은 국내주식·채권, 해외주식·채권, 대체투자, 단기자금 등 여섯 개 부문으로 나뉘어 운용된다. 그중 인프라와 부동산·사모펀드 등 상대적으로 투자 영역이 넓은 대체투자에서 국내 소재·부품 기업에만 투자하는 부문을 신설하겠다는 얘기다. 지난 5월 말 기준 대체투자 영역에서 운용되는 기금 규모가 81조4,000억원(11.9%)에 달하는 점을 감안하면 조(兆) 단위 자금이 조성될 것으로 전망된다.

반일감정과 소재·부품 산업의 위기를 감안하면 기금위에서 안건이 통과될 가능성은 높다. 기금위원 3분의1이 동의할 경우 기금위는 공식안건으로 논의해야 한다. 이 위원은 올해 초 국민연금이 한진칼에 ‘기관투자가의 의결권 행사 지침(스튜어드십 코드)’을 적용하도록 해 고(故) 조양호 전 한진그룹 회장의 대표이사 해임 안건 통과를 이끌어냈다.

득보다 실이 클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수익성이 담보되지 않은 상태에서 자칫 손실만 키울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전광우 전 국민연금공단 이사장(전 금융위원장)은 “실효성을 기대하기 어렵고 오히려 역효과가 날 수 있다”며 “기금운용의 자율성·독립성·수익성에 부담이 될 가능성이 높다는 점에서 원칙적으로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했다.

정부는 신중한 입장을 보이고 있다. 복지부 고위관계자는 “그런 제안이 들어온 것은 맞는데 아직 회의 개최 여부도 확정되지 않았다”며 “(기금위원들의) 의견을 기다리고 있다”고 전했다.





정부가 국민연금을 국가 예산처럼 동원하는 것이 처음은 아니다. 참여정부 당시인 지난 2004년, 이헌재 전 경제부총리가 10조원 규모의 한국형 뉴딜 사업에 국민연금 등 연기금의 여유재원을 활용하겠다고 발표하면서 논란이 크게 일었던 바 있다. 당시 한나라당 등 야당뿐 아니라 보건복지부를 이끌던 고(故) 김근태 전 민주통합당(더불어민주당의 전신) 상임고문이 공개적으로 반발하기도 했다.

같은 논란은 이명박 정부에서도 되풀이됐다. 국무총리실을 중심으로 연기금 기관의 해외자원개발 투자역량 강화방안이 논의됐고 국민연금 기금위는 2011년 해외자원기업에 대한 사모투자를 허용하는 방안으로 투자요건을 완화했다. 국민연금은 이후 사모펀드를 통해 미국 이글포드 등 모두 3개의 자원개발 프로젝트에 투자했다.

이번에도 정책자금으로 국민연금을 동원하는 일이 현실화할 가능성이 높다. 일단 정책결정권을 쥔 이도 평소 국민연금의 공공투자를 강조한 김연명 청와대 사회수석이다. 김 수석은 지난해 국민연금이 공공주택에 투자하면 주거 문제가 해결된다고 발언하기도 했다. 당연직위원 6명을 포함해 기금위원의 구성이 친(親)정부 성향이라는 것도 통과 가능성에 무게추가 쏠리는 이유다.

문제는 국민연금의 상황이 과거와 비교해 더 나빠졌다는 점이다. 우선 2001년 국제통화기금(IMF)이 고갈 위기를 경고한 지 2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났지만 뚜렷한 해법을 찾지 못하고 있다. 국민연금은 장기재정 추계상 2041년(1,778조원) 정점을 찍고 내림세로 돌아서 2057년에는 기금이 고갈된다. 이를 막기 위해 문재인 정부가 지난해 말 ①현행유지 ②현행을 유지하되 기초연금 40만원으로 인상 ③소득대체율 45% 상향, 보험료율 12% 인상 ④소득대체율 50% 상향, 보험료율 13% 인상 등 네 가지 방안을 담은 개편안을 국회에 제출했지만 논의조차 되지 않고 있다.

고갈 시기를 늦출 유일한 버팀목인 운용실적도 위태롭다. 국민연금은 지난해 -0.92%로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첫 운용손실을 기록했다. 올 들어 5월 말까지 5.69%의 누적 수익률을 기록했지만 최근 2,000선 밑으로 내려앉은 코스피지수 등을 볼 때 연말 성적표는 이보다 더 나쁠 수밖에 없다. 더욱이 최근 급락하는 주식시장의 ‘안전판’ 역할까지 떠맡았다. 수익률이 더 낮아질 수 있는 셈이다.

전문가들은 정부가 국민 노후자금을 쌈짓돈처럼 활용하지 말아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익명을 요구한 서울 소재 한 대학의 교수는 “소재·부품 산업을 육성하는 데 국민연금의 역할이 필요하다고 하더라도 정부가 자금 조성을 위해 발행하는 채권을 매입하는 수준에서 그쳐야 한다”며 “가입자에게 지급될 돈이라는 목적을 제외한 다른 목적으로 운용하라는 노이즈(noise)가 들어가지 않도록 기금운용본부의 독립성을 빨리 확보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상훈기자 세종=빈난새기자 ksh25th@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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