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95년 완공된 서울 강남구 테헤란로의 포스코센터는 순수 국산기술로 지어진, 우리나라 1세대 인텔리전트 빌딩으로 주목받았다. 유리와 철강으로 이뤄진 이 모던하고 화려한 건물의 또 다른 볼거리는 곳곳에 설치된 미술작품들이다. 공공미술 활성화를 표방한 문화예술진흥법에 따라 연면적 1만㎡가 넘는 건물의 경우 건축비의 0.7% 이상을 미술장식품으로 설치해야 하는 일명 ‘1%법’이 1995년 그해부터 의무화된 것과도 무관하지 않다.
잘 알려지지 않은 이 포스코센터만의 가치는 백남준과 그 부인 구보다 시게코의 작품이 공공미술로 나란히 전시 중인, 전 세계 유일한 공간이라는 사실이다. 건물에 들어서기 전 유리 건물 밖에서부터 눈길을 끄는 수백 개의 모니터 작품 ‘철이 철철-TV깔때기, TV나무’이다. 이 중 ‘TV깔때기’가 TV샹들리에 연작을 제작했던 백남준의 작품이고, ‘TV나무’가 바로 구보다의 유작이다. 일반적으로는 두 작품 모두 백남준의 것으로 알려져 있다. ‘TV나무’가 구보다의 작품이라는 사실은 일부 관계자들만 알고 있는 ‘비밀 아닌 비밀’이다. 작품 앞 명패에도 구보다의 이름은 없다.
포스코는 1994년 당시로는 파격적으로 건물 안팎의 조형작품 조성을 위해 미술평론가 신용덕씨를 예술감독으로 선임했다. 건축물의 1%에 해당하는 30억원 상당의 예술작품을 설치하는데, 이왕 하는 것이면 제대로 해보자는 계획이었다. 결과적으로 포스코는 법규가 정한 미술품 구입비보다 더 많은 비용을 집행해 수준 높은 작품들을 확보했다.
신용덕 예술감독의 의뢰를 받은 백남준은 한국 방문길에 구보다와 동행했고 함께 신축 공간을 돌아봤다. 당시 백남준은 1993년 베니스비엔날레 황금사자상 수상과 대전엑스포 등 왕성한 활동으로 연예인 못지않은 인기를 누리던 때였다. 이들 부부를 맞기 위해 회사 임원들이 내려와 줄지어 기다렸을 정도였다. 예술감독이 의뢰한 작가가 백남준이었고, 작품계약서 상의 작가도 백남준뿐이었다. 하지만 작품 제작지원을 맡은 국내 대리인 박영덕 박영덕화랑 대표에 따르면 나중에 팩스로 드로잉과 설계도가 도착했는데 백남준의 깔때기형 샹들리에 작품과 구보다의 나무 형태 작품이 같이 있었다.
엄연한 공동작품임에도 구보다의 작가명이 들어가지 못한 사연에 우여곡절이 있다. 원래는 백남준 혼자 작업할 계획이었으나 구보다가 남편의 무리한 작품 활동에 대해 노골적으로 ‘반대’ 목소리를 냈다. 뉴욕으로 돌아가 아내를 설득하던 백남준이 “그럼 당신도 같이 작업하자”고 권해 마음을 돌렸다. 하지만 조형물 계약서는 이미 백남준의 단독 명의로 작성된 상태였다. 게다가 여론을 의식해야 했다. 백남준은 앞서 1988년 국립현대미술관에 ‘다다익선’을 설치할 때도 그랬고, 1993년 대전 엑스포 때도 마찬가지로 국내 작가들의 격한 반발을 마주하곤 했다. 한국에서 활동하지도 않는 작가인데 ‘왜 백남준이냐’는 비판이었다. 포스코센터에 백남준 작품이 설치된다는 사실이 알려졌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왜 또 백남준이냐’는 불만이 터져 나왔는데 아내도 작가로 함께 참여한다는 사실까지 일부러 밝히기는 어려웠다. 정치적 상황도 맞물렸다. 지난 1965년 체결된 한일청구권협정에 따라 당시 우리 정부가 받은 대일 청구권 자금의 일부가 포항제철(포스코의 옛이름) 건설비 등 경제개발에 사용된 것이 뒤늦게 알려진 상황이었다. 이를 둘러싼 논란은 수십 년째 지금도 유효한 것이어서 ‘일본인’ 아내 구보다의 이름을 내세우기는 더욱 곤란했을 것으로 추론할 수 있다.
바닥면 지름 7m에 원뿔 높이 7m인 ‘TV깔때기’는 백남준이 직접 설계했고 뉴욕스튜디오의 조수인 요한 사와카가 한국으로 와 세부 디자인을 실행했다. 설치는 전담 엔지니어 이정성이 맡았다. 깔때기형 철제 구조물을 먼저 매달았고 213개의 모니터는 위치를 다시 잡아가며 추가하는 방식이었다. 천장과 바닥이 작품 무게를 지탱할 수 있을지는 사전 구조진단을 통해 확인받았다. 박영덕은 “백남준 선생이 처음에는 모니터 100대 정도로 계약했는데 나중에는 규모가 커지면서 200대까지 늘었고 구조물을 천장에 매단 이후에도 ‘하나만 더 달아보자’는 식으로 들어났다”면서 “백남준 같은 파격적 상상력의 소유자니까 그런 몇t짜리 육중한 작품을 천장에 매달 생각을 하지 보통의 작가 같았으면 엄두도 못했을 규모와 구조의 작품”이라고 말한다. 이정성은 “미국에서 귀국하자마자 곧장 포스코센터로 가서 모니터를 설치했는데, 외줄에 매달린 원뿔 형태가 중력 때문에 빙빙 돌아 고역이었다”면서 “와이어로 작품을 고정한 다음 위에 매달려서 모니터를 설치하고 있었는데 바닥 작업 중이던 공사업체 인부가 고정용 와이어를 싹둑 잘라버리는 바람에 갑자기 작품이 회전해 큰 사고가 날 뻔했다”고 회고했다. 작품 설치가 계획보다 늦어지자 시공사 측은 준공사진을 찍어야 한다며 작업 중단을 요청했다. 결국 1,200만원짜리 조립식 비계를 허물고 치웠다가 재설치해서 작품을 마무리했다.
백남준의 ‘TV깔때기’는 관람객의 키높이 위쪽에 설치돼 올려다보게 한 작품으로 통행에 방해되지 않으면서 멀리서도 잘 보이는 게 특징이다. 실제로 이 작품은 테헤란로를 지나는 사람들은 물론 달리는 자동차 안에서도 볼 수 있다.
구보다 시게코의 ‘TV나무’는 높이가 11m인데, 뻗은 나뭇가지의 나뭇잎처럼 TV모니터가 올망졸망 매달린 구조다. 이 작품은 구보다가 설계와 디자인을 해, 이정성에게 설치를 부탁했다. 총 두 그루의 나무인데, 하나는 앞쪽에 있고 나머지 하나는 TV깔때기를 사이에 두고 안쪽에 비스듬히 자리잡고 있다. 국내에 소장된 구보다의 작품은 극히 적다. 서울 올림픽공원 내 국민체육진흥공단의 소마미술관이 구보다의 작품 ‘조깅하는 여인’을 소장하고 있으며 용인민속촌 내 미술관도 소장작품이 있으나 현재는 미술관 운영을 중단해 작품을 볼 수는 없다. 미술평론가인 정준모 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실장은 “백남준은 그간 해오던 샹들리에 연작을 최대 규모로 확대한 형태였고, 구보다는 생명성을 주제로 한 작품을 지속적으로 보여주면서 생명수(樹) 연작을 보여주던 때였다”면서 “백남준과 구보다의 작품이 나란히 전시된 포스코센터는 ‘백남준 부부가 함께 사는 집’이라 부를 만하다”고 설명했다.
작가가 두 명이라는 사실 못지 않게 작품이름의 ‘개명 사연’도 흥미롭다. 이들 작품은 2001년까지만 해도 ‘TV깔때기’와 ‘TV나무’라 불렸다. 이 두 작품이 지난 1995년 ‘서울에서 가장 비싼 조형물’ 1위에 이름을 올려 언론에 소개될 때도 그 이름이었다. 당시 ‘아파트 두 채 값인 시가 4억원 상당’으로 알려졌다.
그러던 중 포스코갤러리가 1998년 기업미술관인 포스코미술관으로 이름을 바꾸고 2000년 무렵 학예실의 진용을 갖추면서 수장고 정리를 시작했다. 수장고 한 구석에서 신문지로 꽁꽁 둘러싼 폭 60㎝ 정도의 아크릴 액자 하나가 발견됐다. 소장품 목록에도 없는 작품이었다. 조심스레 포장된 신문지를 벗겼다.
‘철이 철철’. 백남준이 작품 완성 시점에 맞춰 손수 적어준 드로잉 작품이었다. 이를 발견한 미술관 측은 당혹스럽기도 했으나 이정성·박영덕·정준모 등 당시 작품 설치를 곁에서 지킨 이들은 반가웠다. 백남준은 철강회사 포스코에 철이 철철 넘쳐나기를 기원하며 특유의 익살스러움을 담아 작품 제목을 지었다. 철을 상징하는 빨강을 주조색으로 풍요로운 노랑과 강인한 검정을 섞어 ‘철이 철철’을 적었고 그 아래에 ‘95’라는 제작연도와 자신의 서명을 남겼다. 작가 측에서는 건축 시공 담당자에게 작품 제목을 알려주며 이 그림을 건넸지만 포스코로 전달되는 과정에서 세부 설명이 누락되고 말았다. 그리하여 작품은 완성 후 한참을 다른 이름으로 불리다 6년 만에 제 이름을 되찾았다. 작품 명패도 다시 제작돼 지금은 ‘TV깔때기, TV나무 (철이 철철)’로 적혀있다.
백남준은 앞서 ‘다다익선’을 제작한 후 모니터 작동이 중단되는 것에 대해 고민했던 터라 ‘TV깔때기’의 경우 모니터 전체에서 화면이 나오게 하는 것이 아니라 ‘꺼진 모니터’가 공존하게 설계했다. 그는 “100대 중 10대 정도는 고장 나도 내 작품은 상관없다”면서 5~10% 정도는 고장나도 상관없다는 내용의 확인서를 포스코 측에 친필로 써주었다고 한다.
/조상인기자 ccsi@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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