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에서 고등학생 연극반 활동을 하던 지난 1979년, 극단 광대의 마당극 ‘돼지풀이’를 봤다. 세상에 이런 연극이 다 있나 싶었다. 우리 전통 마당극을 바탕에 놓고 현대화를 시도한 새로운 형식의 극이었다. 국가 지원금을 준다고 해서 농민들이 돼지를 키웠는데 뒤늦게 정부가 돼지 수입을 강행해 이에 저항하는 사회적 이슈가 연극무대에 올려진 것 또한 충격이었다. 그때 어렴풋이 감지했다. ‘예술은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어야 한다’고. 광주에 살던 소년은 이듬해 역사의 현장을 온몸으로 경험했다. 희망은 확신이 됐다. ‘예술이 세상을, 사회를 바꿀 수 있다’는 신념으로 살았다. 연극배우로 시작해 극작·연출·기획·공동창작 등 ‘1인 다역’을 불사하며 젊은 시절을 불태웠다. 지난해 8월 취임한 김도일(57·사진) 예술경영지원센터 대표다.
20대 때부터 15년간은 소위 ‘사회문화운동’에 투신했다. 1992년에는 극단에서 직접 제작한 작품이 해외 진출에 성공했다. 영화 쪽까지 발을 넓혔다. 영화 ‘화려한 휴가’ 등의 홍보를 그가 맡았다. 예술인들이 마음 놓고 작업할 수 있게 돕고 싶은데 방법이 곤궁한 것이 늘 답답했다. 개인사업도 해보고 시의회·학계·재단 등지의 업무를 두루 섭렵했다. 그 모든 경험과 이력이 쌓여 오늘의 자리에 이르렀다.
“‘예술이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게 내 얘기인 줄 알았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독일 극작가 베르톨트 브레히트(1898~1956)가 먼저 한 말이더라고요. 30년가량 문화계에서 뒹굴며 깨달은 것은 ‘예술이 세상을 바꿀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행복하게 해줄 수는 있겠다’는 믿음입니다.”
취임 1주년을 맞은 김 대표는 “예술경영지원센터를 이끌면서 소통·협력·균형을 강조했다”면서 “특히 소통은 내부 소통은 물론 기관 간 협력과 시너지를 뜻하는 것이며 예술현장과의 소통, 지역과의 협력도 아우른다”고 강조했다. 지향점은 예술계의 ‘자생적 선순환 생태계 조성’이다. 사실 이는 과거 정부들도 세부 표현만 달리하며 수십년 이상 추진해온 과제였으나 실현이 쉽지 않았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예술은 정치권력과 종교·재력의 후원을 등에 업고 성장한 태생적인 배경을 가졌으니 ‘나랏님도 해결하기 어려운’ 일임은 분명하다. 고심하던 김 대표는 유관기관과의 협력을 제안했다.
“문화예술정책 부분에 관련된 기관을 보면 창작과 제작은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지원하고, 우리 예술경영지원센터는 매개와 유통 부문을 맡고 있습니다. 여기다 예술인복지재단이 예술인에 대한 개별적 복지를,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이 교육 쪽에서 역할을 수행합니다. 플랫폼으로는 예술의전당이 대표적이죠. 각자 잘하고 있지만 순환적 구조를 갖는 기관들이 손을 잡고 협력하면 더 큰 효과를 이끌어낼 수 있습니다. 정책적 문제 발굴과 함께 협력하자고 내가 제안했고 중간자 역할을 맡아 협의를 정례화하고자 합니다.”
전략적 제휴 협력을 통해 파편화된 예술 분야에 대한 합리적 지원사업을 추진하려는 계획이다. 그 사례로 예술경영지원센터의 ‘예비전속작가제도’와 예술의전당의 ‘미술관 공공성 강화’가 손잡을 예정이다. 김 대표는 “신진작가들이 안정적으로 작업할 수 있도록 예비전속작가를 선정하면 우리 기관과 갤러리가 2대1로 총 150만원씩 매달 10개월간 작품활동 지원금을 주는 제도가 있는데 80명 선발에 1,000명 정도의 작가들이 몰렸다”면서 “마침 미술사업 분야의 공공성 강화를 목표로 내건 예술의전당이 내년 하반기에 ‘예비전속작가들’의 기획전을 마련해 기관 간 협업의 시너지를 보여줄 것”이라고 말했다. 서울문화재단과의 협력으로는 국내 최대 공연제인 ‘서울국제공연예술제(SPAF)’의 해외 진출을 돕는 장터로써 ‘서울아트마켓(PAMS)’을 기획해 지난해 첫선을 보였다. 해외 바이어들이 직접 작품 쇼케이스를 보고 구매도 할 수 있게 했다.
김 대표가 주력하는 분야 중 하나는 데이터를 집계·관리하는 통합전산망시스템이다.올 6월25일부터 공연전산망 관련 공연법이 시행됐고 공연예술통합전산망이 가동하기 시작했다. 그동안은 연극·무용·뮤지컬·클래식 등 각종 공연과 관련해 누가 어떤 공연을 보고 어떤 주제를 선호하는지조차 정확하게 파악하기 어려웠다. 현황 집계가 되지 않으니 투자 유치의 근거도 취약하고 공공기관이 정책을 짜는 것조차 어려웠다. 영화계는 ‘영화입장권 통합전산망’이 구축돼 의무화하면서 정보수집률이 99%에 이르렀고 이것이 영화진흥지원정책의 수립근거로 활용됐다.
“데이터 등록이 의무화됐고 올 연말까지를 목표로 시스템 간의 연계가 진행 중이고 우리 센터에서는 축적되기 시작한 데이터를 어떻게 활용할지 구상 중입니다. 여러 데이터를 근거로 소비자에게는 선택의 기회를 주고 업계 관계자들에게는 홍보마케팅 전략의 근거를 제공하고 기관에는 정책 입안의 자료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수치 집계에서 한발 더 나아가 김 대표는 “다른 공공데이터와 결합한 다양한 모델들을 만들 수 있다”고 귀띔했다. 공연데이터를 기반으로 교통정보를 제공받고 활용하는 등 생활 편의를 경험할 날도 머지않았다. 4차 산업혁명 기술이 문화예술소비 활성화와 손잡을 미래가 눈앞에 다가오게 됐다. 다만 소극장들은 10% 안팎의 현장발권 수치가 집계되지 않는 점, 3일 미만의 단기공연에 대한 집계 어려움 등의 보완점은 개선해야 한다. 미술 시장의 경우 ‘한국미술시장정보시스템’을 운영하고는 있으나 거래내역 집계 등 1차 자료 수집에서부터 난관이 크다. 미술 시장은 영화·공연과 달리 사적 거래 시장이라는 특수성도 작용한다. 이에 대해 김 대표는 “미술 시장 정보시스템의 명칭부터 세부항목 전반에 대한 정교한 재점검을 준비하고 있다”고 말했다.
스스로 지방 출신임을 강조하는 김 대표의 강점은 예술 분야의 수도권 쏠림 현상에 대한 극복 의지다. 지역 간 괴리를 극복하기 위한 해법으로 그는 ‘교육’을 지목했다.
“지역 문화재단들을 일일이 설득해 우리 센터의 ‘예술경영아카데미’를 지방에서도 실시하도록 유도하고 있습니다. 예술경영이라는 표현조차 생소한 현장종사자들이 예술성과 수익성의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게 하려는 재교육 프로그램인데요. 회계·세무 같은 실무적인 내용부터 예술계 트렌드, 저작권법 등 다양한 분야를 아우르며 수요에 맞게 프로그램을 기획했습니다. 작품에 몰두하느라 유통·재정 문제에 어두운 창작자들도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이 문제에서 소외돼 있기에 그동안 지역 예술계가 뒤처졌지만 이제는 청주·원주 등 전국 각지에서 예술경영아카데미가 열립니다.”
2007년부터 시작된 예술경영아카데미가 그간 1만5,000여 예술계 종사자들과 만났지만 김 대표 취임 이후 지역으로의 확장세가 두드러진다. ‘미술 담론 사업’의 경우 수도권 중심에서 벗어나 광주·부산·대구 등지에서 공립미술관과 협력해 지역 미술을 알아보는 세미나를 개최했다.
지원사업 분야도 창업부터 재교육까지 32개로 늘렸다. 창업지원사업 ‘예술해커톤’을 통해 현재 3개 스타트업 기업이 문을 열었다. 취업 컨설팅을 통해 구인난을 겪는 예술단체와 취업난을 겪는 학생들을 연결해주기도 한다. 1년간 일하고 보니 이 모든 것들이 지난 30년간 꿈꾸던 일이었다.
“제일 좋아하는 화가가 르네 마그리트입니다. 초현실주의 화가로서 몽환적인 그림을 그린 듯하지만 마그리트는 아름답다고 규정짓고 보는 게 아니라 낯설게 보기를 통해 ‘다르게 보기’를 실현했죠. 예술경영센터에 와서 그 어느 때보다 그림과 공연을 많이 보고 있습니다. 비판적 사고를 갖게 한다는 것, 기존의 틀을 뚫고 나가 본다는 것에서 새로운 동력과 전혀 예상하지 못한 해법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것이 예술의 힘입니다. 예술이 세상을 바꾸지 못하더라도 좀 더 행복한 세상을 만들어준다는 게 그 때문이죠.”
/글=조상인기자 ccsi@sedaily.com·사진=성형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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