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남준이 국립현대미술관이 기획한 대규모 회고전 때문에 평창동 올림피아호텔에 묵고 있던 1992년의 어느 날이다.
한국 현대조각의 1세대 작가인 조각가 김영중(1926~2005)이 백남준을 찾아왔다. 그는 광화문광장 앞 세종문화회관 외벽의 대리석 부조 ‘비천상’을 제작했고, 독립기념관의 ‘강인한 한국인상’ 등으로 유명한 작가다. 1만㎡ 이상 대형 건축물이 의무적으로 건축비의 일정 부분을 미술품 설치에 쓰도록 한 일명 ‘1% 법’을 제안한 이도 그다. 판을 크게 보고, 멀리 본 사람이었다. 전남 장성 태생이지만 광주지역에 뿌리를 두고 전국구로 활동한 작가다.
“광주에서 대규모 국제미술제를 열어봤으면 합니다. 국내외에서 활약하시는 백남준 선생이 아이디어가 있을 것 같아 뵙자고 했습니다.”
백남준은 무척 반가워했다. 대한민국이 1988년 서울올림픽 개최를 기점으로 국제화에 가속도가 붙었지만 정작 문화예술계는 속력이 더뎠다.
“국제전 성격으로, 2년에 한 번씩 열리는 비엔날레를 하나 만들었으면 좋겠습니다. 성사될 수 있게 제가 가지고 있는 국제 네트워크를 총동원해보겠습니다.”
1995년을 목표로 잡았다. 1990~1991년 당시 이어령 문화부 장관이 매년 ‘문학의 해’ ‘영화의 해’ 등을 제정해 둔 것이 1995년 ‘미술의 해’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광복 50주년과도 맞물렸으니 분명 의미가 큰 해였다. 광주 미술계는 이를 내다보고 느리고 긴 준비에 착수했다.
지금은 광주비엔날레 외에도 부산비엔날레가 있고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 대구사진비엔날레, 청주공예비엔날레 등 장르 특화의 비엔날레까지 전국적으로 생겨났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우리나라에 ‘비엔날레’는 ‘엑스포’만큼이나 생소한 행사였다. 백남준이 1993년 베니스비엔날레 독일관 작가로 참가해 최고 영예인 ‘황금사자상’을 받은 것을 계기로 비엔날레에 대한 전국민적인 인식과 관심이 높아졌다. “우리도 비엔날레 한 번 만들어 볼까”라는 생각이 여기저기서 생겨나기 시작했다. 국내 최대 규모의 미술인 단체인 한국미술협회가 서울에서 개최하는 비엔날레에 대해 논의를 시작했다. 춘천비엔날레를 생각한 이는 강원도 춘천에 지역구를 둔 4선 국회의원으로 1993년에 초대 문화체육부 장관이 된 이민섭 전 장관이었다. 광주비엔날레는 김영중 등 미술인들의 의견을 받아들인 강운태 당시 광주시장이 추진력을 더했다. 비엔날레를 둘러싼 서울, 춘천, 광주의 3파전이 소리 없이 시작됐다.
강운태 전 시장은 김영삼 정부 때 청와대 비서실을 거쳐 농림수산부와 내무부 장관까지 지낸 인물이다. 정치 실세의 힘을 광주로 끌어들일 수 있었다. 그간 현지 미술계가 백남준의 해외 인맥까지 끌어들여 탄탄한 기획안을 마련해 둔 것이 저력으로 작동했다. 김영중 조각가와 강 시장이 의기투합해 1994년 9월28일 광주시에 광주비엔날레 창설을 위한 실무기획단이 꾸려졌다. 도시 간 팽팽한 세 대결 끝에 그해 11월5일, 문화체육부가 ‘광주비엔날레’ 개최를 승인했다. 88올림픽 국제미술제 예산이 90억원이었는데 제1회 광주비엔날레 개최에 100억원의 예산을 투입하기로 했다. 국내에서 개최된 미술행사 예산으로는 사상 최대 규모였다. 광주비엔날레 조직위원회가 꾸려졌고 임영방 국립현대미술관장이 조직위원장으로 선출됐다. 조각가 김영중, 이만의 광주 부시장, 오광수 미술평론가가 부위원장으로 뽑혔다.
보통 국제행사, 국제미술제가 열리더라도 단발성으로 그치기 십상인데 광주비엔날레는 달랐다. 조직위원회가 구성되기가 무섭게 즉시 국제 심포지엄이 열렸다. 1994년 12월18일 광주문예회관 소극장에서 열린 심포지엄에 아칼레 보니토 올리바 전 베니스비엔날레 위원장, 넬슨 아귈라 상파울루비엔날레 위원장, 킴 레빈 미국미술평론가협회 회장 등 걸출한 국제미술계 인사들이 집결했다. 단숨에 이뤄진 듯하지만 그 뒤에는 묵묵하게 자신의 인맥을 가동한 백남준이 있었다.
조직위원회는 2회에 걸쳐 국제, 국내 심포지엄을 열었고 다양한 의견을 검토해 1995년 1월 집행위원회에서 ‘경계를 넘어’를 주제로 정했다.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처음 창설된 비엔날레로서 기존 비엔날레들과의 차별성을 강조하면서 광주의 역사적 토대와 지역적 정체성을 반영하고 앞으로의 전망까지 드러내려는 고심 끝에 얻어낸 주제다. 그에 맞춰 백남준이 제안했다.
“‘경계를 넘어’라는 주제에 맞게 비엔날레 본전시 커미셔너(전시기획자)를 5대양 6대주로 나눠보는 게 어떨까요?”
이념과 종교, 국경과 인종, 문화의 경계를 넘어 예술로 세상을 아우르는 것은 백남준의 예술관 그 자체와도 일치하는 것이었다. 든든한 백남준이 있었기에 지방에서 열리는 신생 행사임에도 불구하고 전 세계 거물급 큐레이터들이 총출동했다. 북미 지역 커미셔너로 보스턴현대미술관 큐레이터와 워커아트센터 관장을 지낸 캐시 할브라이쉬 뉴욕근현대미술관(MoMA) 부관장이 참여했다. 유럽은 동서로 나눠 서유럽은 퐁피두센터의 전설적 큐레이터 장 드 르와지 전 팔레드도쿄 관장이, 동유럽은 폴란드 출신으로 바르샤바 국립현대미술관장을 지낸 안다 로텐버그가 맡았다. 중동과 아프리카 지역은 영국 출신의 독립 큐레이터로 국립미술관 분관 격인 리버풀 테이트갤러리에서 한국현대미술전을 기획한 적 있는 클라이브 아담스가 지휘했다. 여기에 아시아지역 커미셔너로 오광수, 남미 지역은 성완경, 한국과 오세아지역은 유홍준 등 국내 미술평론가들이 참여했다.
광주비엔날레 탄생의 ‘뒷배’가 된 백남준은 신작도 선보였다. 작품 구상을 위해 그는 직접 광주를 방문했다. 상다리 부러질 듯한 한식 상차림에 눈이 휘둥그레진 백남준을 한 번 더 놀라게 한 것은 ‘고인돌’이었다. 광주 인근에 댐을 조성하면서 고인돌 군락지가 수몰 위기에 처하자 전남 장성으로 옮겨와 조성한 고인돌 공원을 직접 보고서다.
“우리나라에 이렇게 고인돌이 많은지 몰랐어. 하기야 내가 30년 가까운 외국 생활로 광주항쟁도 가까이서 알지 못했고 그 바람에 희생된 고인들도 잘 알지 못했지.”
고대 권력자들을 위해 조성된 거대한 돌무덤 앞에서 백남준은 5·18민주화항쟁으로 희생된 ‘고인들을 위한 고인돌’을 구상했다. TV 모니터를 고인돌처럼 쌓아 올리고 그 앞에 실제 돌 등을 배치한 이 작품은 지금도 광주시 북구 광주비엔날레 전시관에 가면 만날 수 있다. 백남준은 이 작품을 전시한 후 비엔날레재단에 기증하기로 마음먹었다. 작품 제작비 마련을 위해 광고 모델로 나섰다. 마침 그해 창립 45년이던 음료회사 칠성사이다와 마음이 맞았다. 당시 백남준은 지금의 ‘BTS(방탄소년단)급’이라 할 정도로 전 세계적 스타였으니 기업이 마다할 리 없었다. 광고는 총 3편으로 버전을 달리해 제작됐다. 그 1편인 ‘기억하는 과거’는 88올림픽 행사음악과 영화음악 등으로 폭넓게 활동해온 김수철이 작곡을 맡아 현란한 화면에 전자음향으로 박진감을 더했다. 전차, 소싸움, 농촌의 아이들 같은 흑백 화면부터 88서울올림픽까지 속도감 있게 전개되는 영상이 대한민국의 역사를 압축적으로 보여줬다. ‘기억하는 과거’ 편에는 백남준이 도입부에 등장한 후 국립현대미술관에 설치된 ‘다다익선’을 배경으로 한 마무리 장면에 다시 출연한다. 국악 선율을 배경으로 한 ‘창조하는 현재’ 편은 병아리처럼 노란 교복을 입은 유치원생의 등원 장면부터 대전엑스포를 배경으로 한 행진장면, 당시 신세대인 ‘X세대’의 대담한 의상과 춤, 붐비는 지하철역과 24시간 편의점 등 발전하는 대한민국의 역동성을 롤러코스터 영상과 함께 속도감 있게 펼쳐 보였다. 안방에서 TV로 세계적 작가 백남준의 비디오아트를 만났으니 대중도 반가운 일이었다.
마침내 1995년 9월20일 제1회 광주비엔날레의 막이 올랐다. 백남준은 개막행사로 이날 저녁 광주문화예술회관 대극장에서 펼쳐진 ‘비디오 퍼포먼스’에도 참여했다. 백남준의 친누나에게 가야금을 가르친 인연으로 ‘친구’가 된 국악인 황병기(1936~2018)가 가야금 독주곡 ‘남도환상곡’으로 포문을 열었고 백남준은 30분짜리 ‘비디오 오페라’를 공연했다. 그의 공연이라는 게 늘 파격이다. 피아노와 계란, 야채와 풍선, 카메라와 모니터가 마련된 가운데 백남준이 등장했다. 그는 피아노를 넘어뜨렸고 옆에 있던 야채와 계란 등이 뒤엉켰다. 무대 뒤 모니터에서는 카메라가 그의 머리카락, 눈꺼풀, 치아, 혀, 턱수염 등을 확대해 보여준다. 백남준이 피아노를 괴롭히는 것은 권위적인 전통으로부터의 탈피를, 야채·계란과의 뒤범벅은 자연과의 조화·순환을 뜻한다. 얼굴 일부를 확대해 보여준 것에 대해 작가는 “귀에는 표정이 없기에 비디오카메라를 통해 나를 보여주자면 눈꺼풀과 입술과 혀를 동원할 수밖에 없다”는 특유의 선문답 같은 대답과 함께 “그것을 놓고 예술과 삶 사이의 경계문제를 생각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이 퍼포먼스가 더욱 화제였던 것은 같이 출연한 현대음악가 비타우타스 란스베르기스 때문이기도 했다. 지휘자 겸 음악가였던 란스베르기스는 1960년대 백남준의 플럭서스(Fluxus) 동지였다. 이후 리투아니아가 소련으로부터의 독립운동을 펼치던 1990년, 그는 리투아니아의 수도 빌니우스에 모인 수천 명 군중 앞에서 베토벤 교향곡 ‘합창’을 지휘하며 독립운동의 열기를 끌어올렸다. 란스베르기스는 리투아니아의 초대 대통령이 됐고, 한 나라의 대통령을 지낸 독립투사 예술가의 공연은 국내외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백남준은 관객 앞에서 자신과 란스베르기스의 인연을 소개하며 플럭서스 예술사도 소개했다.
아시아 태평양지역 최고의 비엔날레이자, 세계 5대 비엔날레 중 하나로 꼽히는 광주비엔날레의 첫 걸음은 백남준과 함께였기에 더욱 빛났다.
/조상인기자 ccsi@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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