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금융그룹이 글로벌 투자은행(IB) 시장에 도전하며 미래 경영에 나서고 있지만 금융당국의 규제는 이런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는 게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지난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처럼 금융회사가 보인 지나친 탐욕은 규제해야겠지만 미래 먹거리를 찾아 나선 금융사들에 ‘문제가 생기면 안 된다’는 식으로 발목부터 잡고 보는 보신주의적 규제 마인드로는 선진 금융회사와의 경쟁에서 더 멀어지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1일 금융권에 따르면 현행법은 국내 은행이 해외에 지점·법인을 설립할 때 신설계획을 수립하고 이를 바탕으로 금융위와 협의하도록 돼 있다. 이 과정에서 금융위는 신설계획을 보완하거나 제한할 수 있는 권한을 가졌다. 말만 ‘협의’일 뿐 사실상 당국의 허가 없이는 해외에 나갈 수 없는 구조다. 지난해 당국이 은행법 시행령을 개정해 은행의 해외진출 시 사전신고 의무를 완화했지만 이는 국외 지점·법인에 대한 투자액이 자기자본의 1% 미만인 경우로만 한정한 것이라 실효성이 낮다는 지적이다. 시중은행의 한 관계자는 “투자액이 자기자본의 1% 이하로 금융위와 사전협의 의무가 없다고 하지만, 현지 감독당국은 금융사의 건전성, 준법성, 투자계획의 현실성 등에 대해 국내 감독당국의 확인서를 요구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며 “무늬만 규제 완화인 셈”이라고 지적했다. 자기자본의 1% 이상을 투자해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다. 해외진출 국가의 신용등급이 ‘B+’ 이하이거나 신용등급이 없는 경우, 고유·겸영·부수업무 이외의 영업을 하는 경우, 경영실태 평가가 3등급 이하인 경우 등 당국이 미리 정한 사전신고 대상에 해당하면 금감원의 심사를 거쳐야 하기 때문이다.
인수합병(M&A)을 통해 해외에 진출할 때도 출자제한 규제가 덧붙는다. 은행들이 해외 금융사를 M&A하려면 자기자본의 20% 이내에서만 출자할 수 있다. 금융위가 정한 출자요건을 만족시키면 40%까지 확대할 수 있지만 조건이 까다로워 쉽지 않다. 해외진출에 가장 적극적인 신한·우리·KEB하나은행의 경우 자회사 출자총액이 자기자본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모두 10%를 넘는다. 현 상태에서는 국내 은행들이 해외에서 수조원 단위의 중형급 이상 매물을 M&A하기가 사실상 불가능하다. 한 금융권 고위인사는 “국내에 있는 금융회사의 천문학적 자산을 국내에만 투자하라는 상황이라 전부 채권에만 투자하는 기형적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며 “미국이나 영국 런던 등 글로벌 금융시장의 한복판에 랜드마크빌딩을 언제든지 사고팔 수 있도록 해야 하는데 전부 규제에 막혀 있다”고 말했다.
이미 지점·법인 형태로 현지에 진출한 은행들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현지법인에 운용자금 공급을 위해 신용공여를 할 때 자회사의 신용 관련 규제가 적용되기 때문이다. 은행은 자회사에 자기자본의 10%까지 신용공여를 할 수 있고, 모든 자회사에 대한 신용공여 금액의 합계가 자기자본의 20%를 넘어서는 안 된다. 해외진출 초기에는 국내 금융사들의 브랜드 인지도가 낮아 대부분 모은행에서 필요한 자금을 빌려와야 하는데 규제로 자금조달이 어려운 상황이다.
고객 돈을 안전하게 관리하려면 보수적 경영이 필수지만 그렇다고 너무 보신적 규제만 들이대면 수익창출은 고사하고 글로벌 금융사들과의 경쟁에서도 밀리게 된다는 것이다. 금융은 규제산업이다 보니 관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다. 혹 이런 시도를 했다가 당국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을까 하는 무의식이 최고경영자(CEO)들의 뇌리에 뿌리 깊게 박혀 있다는 점도 선진 금융과 경쟁하기 힘든, 또 다른 보이지 않는 족쇄다.
은성수 금융위원장 후보자는 최근 인사청문회에서 ‘왜 국내 금융산업이 정체돼 있느냐’는 최운열 더불어민주당 의원의 질의에 “기본적으로 과감하게 치고 나가지 못한 부분이 있었다”며 “(은행들이) 책임을 지지 않을 일만 하려는 생각이 퍼져 있기 때문인 것 같다”고 답했다. 더구나 은행마다 경쟁력을 갖추려면 각각의 전문성을 갖춰야 하는데 우리는 금융상품도 비슷하게 만들게 하고, 채용비리의 여파로 채용마저 획일적으로 하도록 그림자규제를 하다 보니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은행의 변화를 느끼기가 여간 어렵지 않다는 지적도 나온다.
한 은행 CEO는 “가계대출이나 담보대출 위주의 영업 관행에서 벗어나 미래 성장과 자본시장 중심으로 금융 시스템을 바꾸기 위해서는 금융당국도 금융권의 혁신과 도전을 장려할 수 있도록 현행 면책 시스템을 최대한 활용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서민우기자 ingaghi@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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