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이 주 52시간제의 보완책을 발표하겠다고 한 만큼 당장 시급한 중소기업의 주 52시간 계도기간(처벌유예) 부여가 시행될 것으로 전망된다. 내년 1월부터 종업원 수 50~299명인 총 2만4,000개사(운송·병원 등 특례업종 제외, 2018년 기준)도 주 52시간제가 적용된다. 날로 심각해지는 경기침체, 지난 2년간 30% 가까이 급등한 최저임금 등으로 어려움을 겪는 상황에서 근로시간 단축까지 더해지며 중견·중소기업계에는 위기감이 감돌고 있다. 실제로 고용노동부가 50~299인 기업 1,300개사를 대상으로 실시한 실태조사 결과 10곳 중 4곳이 아직 뚜렷한 대책을 마련하지 못한 것으로 파악됐다. 중소기업들은 준비가 돼 있지 않은 만큼 주 52시간제 시행을 유예해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당장 법 개정이 어렵다면 대기업과 마찬가지로 처벌유예 기간만이라도 달라는 입장이다. 문 대통령이 이날 보완책 발표를 약속한 만큼 대기업과 마찬가지로 계도기간을 부여할 가능성이 높다.
지난 7월 이후 석달 만에 열린 문 대통령과 경제단체장들의 만남에서는 경제 현안과 규제 등에 대한 논의가 주로 이뤄졌다. 앞서 문 대통령은 일본의 경제보복 등으로 경영계의 우려가 높아지던 7월10일 청와대에서 30대 기업 총수 및 최고경영자(CEO)들과 간담회를 열었다. 당시 간담회에도 손경식 한국경영자총협회장, 김기문 중소기업중앙회장, 김영주 한국무역협회장, 강호갑 중견기업연합회장 등 경제단체장 4명과 기업인들이 참석했지만 심도 있는 현안 논의는 이뤄지지 못했다. 34명 가운데 절반이 넘는 18명의 자유발언으로 또 한번 청와대의 ‘쇼잉’이 아니냐는 비판의 목소리도 높았다.
그래서인지 이번에 문 대통령은 4대 경제단체장과 따로 오찬을 진행했다. “경제가 버린 자식 같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높아지는데다 현 경제상황이 너무도 좋지 않기 때문이다. 사상 처음으로 소비자물가가 두 달 연속 하락하고 수출은 10개월 연속 뒷걸음질치고 있다. 여기다 조국 법무부 장관 임명 이후 두 동강 난 여론을 민생 챙기기로 수습하려는 청와대의 의지도 엿보인다.
문 대통령은 이날 모두발언에서 “이번 간담회는 경제계의 이야기를 듣고 의견도 교환해보자는 것이 목적”이라며 “세계 경제 하강이 빠르게 진행되고, 특히 제조업 수출 비중이 큰 나라들이 어려움을 겪는 상황에 대해 하고 싶은 말씀을 편하게 들려주시면 좋겠다”고 말했다. 청와대 측 참석자가 실장급과 수석급으로 제한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날 오찬에는 청와대 측에서 대변인 등 비서관급 인사들은 배석하지 않았고 노영민 비서실장, 김상조 정책실장, 이호승 경제수석과 신지연 제1부속비서관 등이 참석했다.
경제단체장들은 오찬을 마친 후 “현 경제상황에 대한 우려를 솔직하게 문 대통령에게 전달했다”고 전했다. 박용만 대한상의 회장은 “대한상의 회장에 취임한 후 6년 동안 이렇게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자리는 처음이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앞서 지난달 18일 박 회장은 전국상의회의에서 “경제 이슈를 놓고 논의한 것이 언제인지 기억도 안 난다. 경제가 버려지고 잊혀진 자식인가”라며 울분을 토하기도 했다.
손경식 회장도 “지난 2년간 최저임금이 너무 높게 상승해 대기업도 어려움을 겪고 있고 중소기업은 더욱 어려움이 심하다”면서 “근로시간 단축으로도 많은 기업이 어려움을 겪고 있는데 내년부터 50~300인 기업도 포함돼 걱정스럽다”고 말했다.
경제단체장들은 또 우리 경제가 활력을 되찾으려면 규제 완화가 시급하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박용만 회장은 “일부 규제 샌드박스 신청 건에 대해서는 정부기관뿐 아니라 민간 채널까지 창구로 추가해 관문을 넓히면 좋겠다”면서 “서비스 산업도 법 개정에 시간이 소요된다면 정부의 시행령·시행규칙으로 풀 수 있는 내용을 찾아주면 좋겠다”고 당부했다.
최근 한일 갈등과 일본의 경제보복으로 기업들이 겪는 어려움과 지원 방안도 테이블 위에 올랐다. 손 회장은 “최근 한일 경제인 간 교류가 있었고 협력의 필요성에 대한 분위기가 개선되고 있다”면서 “앞으로 한일 기업 간 교류는 적극 이어질 것이므로 양국 정부가 교섭을 잘 진행해주기 바란다”고 말했다. 이번 기회를 부품·소재 산업 경쟁력 강화의 기회로 삼고 대·중소기업 상생 모델 등을 지속적으로 지원해야 한다는 건의도 나왔다.
아울러 경제계는 국회 입법이 지연되면서 국회 상황을 무한정 기다릴 수 없는 만큼 정부가 자체적으로 하위법령이나 해석 등을 통해 기업의 애로를 적극적으로 해소해달라고 요구했다. 기업의 기를 살리는 메시지가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있었다.
문 대통령은 이 같은 경제단체장의 의견을 경청하고 관련 내용을 검토해나가겠다고 했다고 청와대는 밝혔다. 문 대통령은 또 “국회에 제출된 입법안에 대해서는 경제계도 애로사항을 개진해 법안이 신속히 처리되도록 노력해달라”고 당부했다.
한편 이날 청와대 간담회에서도 ‘전국경제인연합회 패싱’은 이어졌다. 전경련은 전 정부 국정농단 사태에 연루된 탓에 현 정부 들어 청와대의 각종 공식 행사에서 배재돼왔다. 최근 더불어민주당 의원들이 현 정부가 들어선 후 처음으로 전경련을 공식 방문하면서 ‘전경련 패싱’ 방침에 변화가 있는 것 아니냐는 분석이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청와대는 이날 모임에도 전경련을 부르지 않으며 당분간 전경련 패싱을 이어갈 뜻을 내비쳤다는 분석이 나온다.
/이재용·이상훈·양지윤기자 jylee@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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