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어렸을 때만 해도 종종 정전이 되곤 했다. 갑자기 전기가 나가면 어머니는 우선 두꺼비집부터 확인했다. 대문 옆에 있는 철제 상자를 열면 그 안에 전선이 복잡하게 얽혀 있었고 그 아래로 여러 개의 스위치가 설치돼 있었다. 각 스위치를 켜거나 끄면 집안을 각 구역에 전기를 공급하거나 차단할 수 있었다. 그 중 하나만 꺼져 있다는 것은 그 구역에서 지나치게 많은 전기를 한꺼번에 사용했다는 의미였다. 이 경우 전기를 많이 잡아먹는 기기를 끈 후 스위치를 다시 올리는 것만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드물게 한계치 이상의 전류가 흘러 퓨즈가 끊어지는 경우도 없지는 않았다. 그때는 퓨즈를 갈아끼워야 했다. 이런 경우에 대비해 미리 퓨즈를 사두는 집도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두꺼비집을 확인하는 것으로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 때 사태는 심각해졌다. 그럴 때면 이웃의 전기도 나갔는지 확인해보는 것이 중요했다. 동네 전기가 한꺼번에 나갔다면 그것은 우리 집의 문제가 아니라 더 큰 단위에서 문제가 생겼다는 것을 의미했다. 아파트 단지로 전기를 끌어오는 전봇대에서 전선이 끊어졌을 수도 있고 지역 변전소에서 보수 작업을 하다 무언가 잘못 건드렸을 수도 있다. 어느 쪽이 됐든 당장 그 원인을 파악할 수는 없었다. 우리 집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 확인되면 어머니는 찬장에서 흰 양초를 여러 개 꺼내 불을 밝혔다. 그때는 집집마다 양초와 성냥이 필수품이었고 어둠 속에서도 쉽게 찾을 수 있는 곳에 보관했다. 텔레비전을 볼 수도, 책을 읽을 수도 없게 되면 일찍 잠자리를 펴고 잠을 청했다.
21세기 한국을 사는 우리에게 전기는 공기(空氣)와도 같다. 언제든 스위치를 넣으면 조명이 켜지고 각종 기기에 전원이 들어온다. 콘센트에 충전기를 꽂아 배터리를 충전하는 것은 (일부 사람에게는) 먹는 것보다 중요한 일이다. 하지만 너무도 당연하게 이것은 전혀 당연한 일이 아니다. 무심한 듯 벽에 설치돼 있는 콘센트의 배후에는 거대한 전력망 인프라가 버티고 있다. 한반도 동남권의 원자력발전소나 서해안의 화력발전소에서 만들어진 전기는 초고압 송전로를 타고 필요한 지역으로 전달된다. 해당 지역에 도달한 전기는 변전소에서 가정이나 공장에서 사용하기에 적합한 전압으로 바뀌어 최종 목적지까지 배달된다. 발전-송전-변전-배전이라는 일련의 과정에서 어느 한 군데라도 문제가 생기면 정전이 된다. 이렇게 보면 때때로 정전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신기한 일이 아닌가. 최근 들어 정전이 매우 드물어진 것은 전기 기술의 정교화도 한몫했겠지만 복잡한 전력망 인프라를 유지·보수하는 노동에 힘입은 것이다.
전기는 무척 신비한 테크놀로지이다. 엄청난 양의 에너지가 전선을 타고 전달되고 있지만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사람이 잘못 건드리면 감전돼 큰 피해를 입을 수 있다. 이러한 특성 때문에 인류는 전기라는 현상을 비교적 늦게까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호박(琥珀)을 비비면 정전기가 발생한다는 것은 일찍이 알려져 있었지만 과학자들은 19세기 초가 돼서야 비로소 전기와 자기가 서로 긴밀하게 영향을 주고받는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자석이 만들어낸 자기장 속에서 도체를 움직이면 전류가 발생한다. 반대로 전류가 흐르는 도체는 자기장 속에서 힘을 받아 움직이게 된다. 이러한 원리를 바탕으로 운동에너지를 전기에너지로, 또 그 반대로 변환할 수 있는 장치들을 만들어낼 수 있게 됐다. 전기장과 자기장은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이를 효과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수학이라는 언어에 의존했다.
전기의 힘이 본격적으로 상용화된 것은 19세기 후반이 돼서였다. 널리 알려져 있듯 발명가 토머스 에디슨(1847~1931)이 최초의 전기 사업을 시작했던 것은 1882년의 일이었다. 맨해튼 남단의 펄가에서 석탄을 연료로 여섯 대의 발전기를 가동했다. 그렇게 생산된 전기는 400여개의 전구에 불을 밝혔다. 사업가로서의 수완이 뛰어난 에디슨은 금세 사업을 확장해 나갔다. 곧 세계 각국에서 에디슨 발전기와 전구를 구입하겠다는 주문이 쇄도했다. 그 중 한 곳이 아시아의 조선이라는 나라였다. 조선 정부는 에디슨 전기회사로부터 경복궁 내에 백열등 750개를 켤 수 있는 규모의 발전기를 구매했다. 에디슨이 처음으로 전기 사업을 시작한 지 5년이 채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이렇듯 전기 기술은 꽤 빠른 속도로 지구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관련기사
한반도 주민들에게 전기와의 첫 만남은 궁궐과 일부 상류층들이나 쓸 수 있었던 전등보다는 오히려 전차를 통해서였을 것이다. 조선의 마지막 임금이었던 고종은 1897년 대한제국을 선포한 직후 설립된 한성전기회사를 통해 전차 사업을 시작했다. 당시 한성의 전차는 현재의 지하철 1호선과 비슷한 노선을 따라 용산에서 출발해 남대문과 종로를 거쳐 청량리까지 운행했다. 전기의 신비로운 힘은 때로 대중들의 저항에 직면하기도 했다. 한 미국인 의사의 회고에 따르면 열대야를 피해 집 밖으로 피신한 일군의 사람들이 시원한 전차 철로를 베개로 삼아 잠을 자다가 새벽에 운행을 시작한 첫 전차에 치어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예기치 않은 사고에 군중은 분노할 수밖에 없었고 급기야 전차를 전복시키고 불까지 질렀던 것이다. 한반도 주민과 전기 기술의 만남이 마냥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각종 사고와 오해에도 불구하고 한반도 전력망은 20세기 들어 그 규모를 점차 키워갔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한반도 이북 지역에는 흥남의 대규모 화학공장에 필요한 전기를 공급하기 위해 거대한 수력발전소들이 만들어졌다. 덕분에 한반도는 당시 기준으로 전기가 풍족한 편이었다. 1935년에 장진강과 평양을 잇는 고압 송전선이 가설됐고 1937년에는 평양과 경성이 연결됐다. 이로써 한반도 전역이 단일 고압 송전망으로 연결됐다. 이러한 사정은 해방과 분단이라는 과정을 거치면서 새로운 문제를 낳았다. 대부분의 전력이 38선 이북의 수력발전소에서 만들어지는 상황에서 분단이 되자 이남 지역의 전력 수급에 비상이 걸렸다. 이 문제는 단기간에 해결될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었다. 1961년부터 한국의 전기사업을 담당하게 된 한국전력은 한국전쟁이 끝나고도 10년 이상 지나고 나서야 비로소 ‘무제한송전’을 선언했지만 정전은 그 후로도 오랫동안 일상다반사였다.
전력망 인프라와 같은 대규모 기술 시스템은 근본적으로 보수적으로 운영될 수밖에 없다. 무언가 바꾸기 위해서는 연결된 수많은 다른 요소들을 동시에 변경해야 하기 때문이다. 한국 전력망의 역사에서 가장 큰 변화는 아마도 배전 전압을 100볼트에서 220볼트로 승압했던 일이었을 것이다. 이 사업은 공식적으로는 1967년 시작돼 2005년까지 지속된 초장기 프로젝트였다. 전압을 올리기 위해서는 공급자 측의 변화만 요구되는 것이 아니라 개별 소비자들의 장치 역시 모두 변화해야 하는 것이었다. 내가 중학교 시절 살았던 집은 1987년에 준공된 (당시로서는) 신축 아파트였는데 100볼트와 220볼트 콘센트가 둘 다 설치돼 있었다. 1990년대까지 가정에서 소형 변압기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었다. 전기기기를 콘센트에 꽂을 때는 뒷면에 표기된 허용전압을 확인하는 것이 매우 중요했다. 잘못 꽂았다가는 ‘퍽!’하는 소리와 함께 영영 못쓰게 됐다.
전기는 우리 가까이에 있지만 그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인프라는 폭넓게 퍼져 있다. 배후의 인프라는 대개 우리 눈에 띄지 않게 숨겨져 있는 경우가 많다. 우리가 테크놀로지에 대해 이해한다고 할 수 있으려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제 기능을 수행하는 기술적 요소들과 그것들이 원활히 작동할 수 있게 해주는 수많은 사람을 인식할 수 있어야 한다.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