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향후 세계무역기구(WTO) 협상에서 개발도상국의 지위를 고수하지 않기로 결정한 데는 자칫 미중 갈등에 얽힐 수 있다는 판단이 작용했다. 미국이 개도국 지위를 박탈해 중국을 압박하려는데 중국이 한국을 방패막이 삼을 수 있다는 것이다.
정부는 미국이 제시한 ‘데드라인’에 맞춰 결단을 내렸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지난 7월 WTO 내 개도국 지위를 이용해 특혜를 누리고 있는 국가를 손보겠다면서 이달 23일까지 개선을 요구했다. 유명희 산업통상자원부 통상교섭본부장은 개선 요구 날짜 직전인 21일 미국 출장길에 올라 무역대표부(USTR)에 향후 개도국 지위를 주장하지 않겠다는 뜻을 전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미중 갈등 피해 우려해 결단=정부가 기한 내에 문제를 매듭짓기 위해 속도를 낸 것은 자칫 미국의 타깃이 될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다. 통상당국은 WTO 개도국 지위를 둘러싼 논란의 발단을 미중분쟁으로 보고 있다. 중국의 성장세를 꺾기 위해 혈안이 된 미국이 보복관세에 더해 중국의 개도국 지위를 박탈하려 한다는 것이다. 문제는 중국이 선진국 반열에 오른 많은 국가도 개도국 지위를 유지하고 있다는 식으로 미국에 맞설 수 있다는 점이다.
개도국 지위를 붙잡고 있다 한들 실익은 크지 않다. 한국은 1994년 우루과이라운드 협상 때 농업 부문에서 개도국 지위를 선언하고 그에 따른 혜택을 누렸는데 이는 우루과이라운드를 대체할 새로운 다자간 협정이 체결될 때까지 유효하다. 특히 향후 상당기간 새로운 협정이 타결될 일이 없다는 게 당국의 판단이다. 협정이 타결되려면 모든 회원국의 동의를 거쳐야 하는데 중국 등이 개도국 지위를 남용하고 있다며 미국은 새로운 협정에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실제 우루과이라운드를 대체할 것으로 주목받던 도하개발어젠다(DDA) 농업협상은 10년 넘게 중단된 상태다. 산업부의 한 관계자는 “중국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것은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에만 국한되는 얘기가 아니다”라며 “어떤 정부가 들어서든 중국을 견제할 것인 만큼 다자간 협상이 이뤄질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말했다.
◇당장 피해 없지만 미래 불확실=정부가 WTO 개도국 특혜를 주장하지 않으면 당장 현재 농업계가 얻는 관세와 보조금 등의 이익은 영향을 받지 않지만 향후 WTO 농업협상에서 이익을 유지하기 어려워질 것으로 예상된다.
홍남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이날 대외경제관계장관회의 후 열린 기자회견에서 “우리가 개도국 특혜를 주장하지 않더라도 이는 미래의 WTO 협상부터 적용되는 것이기 때문에 새로운 협상이 시작돼 타결되기 전까지는 기존 협상을 통해 이미 확보한 특혜를 변동 없이 지속적으로 유지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향후 개도국 특혜를 주장하지 않기로 결정하더라도 당장 농업 분야에 미치는 영향은 없으며 미래 협상에 따라 발생할 수 있는 영향에 대해 대비할 시간과 여력은 충분하다”고 강조했다.
1995년 우루과이라운드 협상에 따라 개도국은 관세 감축과 국내 보조에서 선진국 의무의 3분의2만 이행하게 돼 있다. 이에 따라 우리나라는 1989∼1991년 보조금 총액의 13.3%를 10년간 감축해 연간 총 1조4,900억원 규모의 농업보조금이 허용돼 있다.
하지만 개도국 특혜를 주장하지 않기로 하면서 향후 재개될 WTO 농업협상에서는 관세와 보조금을 현재 수준으로 유지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다. WTO 차기 농업협상의 개시 여부와 시기는 현재로서는 예측하기 어렵지만 개도국 특혜를 주장하지 않는다는 결정은 차기 농업협상에서 한국에 부담으로 작용할 것으로 관측된다.
정부는 만에 하나 협상이 재개될 경우에도 대비하겠다는 입장이지만 이 과정에서 막대한 예산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우선 소규모 농가에 대해 작물과 가격에 상관없이 면적당 일정액을 지급하는 ‘공익형 직불제’를 조속히 도입해 농가소득 안정에 기여하기로 했다. 정부는 공익형 직불제 전환을 전제로 내년도 예산안에 직불금 예산을 올해 1조4,000억원에서 내년 2조2,000억원으로 늘렸다. 기업 출연을 통한 농어촌상생협력기금 확충도 서두른다는 계획을 밝혔다.
/세종=김우보·나윤석기자 ubo@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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