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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람] 강헌 대표이사 "문화는 명리학으로 活人...사람을 살아있게 하는 힘이죠"

[강헌 경기문화재단 대표이사]

명리학으로 더 유명한 종합문화예술인

영화인·음악평론가로 잘나갈 무렵

역술가 말대로 마흔세살에 사경 헤매

고비 넘기고 명리학 독학으로 터득

'명리:운명을 읽다' 베스트셀러 등극

진보적 활동...'좌파명리학'으로 통해

그렇게 될 정해진 운명이란 건 없어

신을 믿듯 사람들 스스로 사슬에 가둬

문화가 건강·행복한 삶에 도움 됐으면

강헌 경기문화재단 대표이사 /권욱기자






소설가가 되고 싶어 국문과에 입학했는데, 음악을 좋아해 음악대학원으로 방향을 틀었다. 정작 졸업 이후에는 영화판에 뛰어들었다. 종합예술이니까. 독립영화집단 ‘장산곶매’에서 영화를 만들었고 시나리오도 썼다. 재주가 많았다. 요절한 가수 김현식(1958~1990)의 생애를 담은 책을 쓴다는 한 후배의 부탁으로 우연찮게 시작한 일이 ‘대중음악 평론가’로 접어든 계기가 됐다. 1990년대 초반, 그때만 해도 척박했던 우리나라 대중음악 평론계에서 강헌(57·사진)은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중 한 명이 됐다. 흥미로운 사실은 포털사이트에 ‘강헌’을 검색하면 연관검색어로 ‘명리학’이 맨 먼저 나온다는 것이다. 이뿐인가. 그는 음식칼럼니스트 황교익과 함께 SBS 라디오 ‘황교익·강헌의 맛있는 라디오’를 진행한 미식가이자 음식평론가이기도 하다. 그런 그에게 묵직한 직함 하나가 더 붙었다. 지난해 말 취임한 경기문화재단 대표이사다. 옛 서울대 농대 자리인 수원시 권선구 경기상상캠퍼스로 옮긴 경기문화재단 집무실로 찾아가 강 대표를 만났다.

취임 1주년을 앞두고 있다고 첫인사를 건네니 “이제 열 달이니 아이가 나올 법도 한데, 난산이다”며 불룩한 자신의 배를 툭툭 두드린다. ‘글발’ ‘입담’으로는 당대 최고 중 하나로 꼽히는 강 대표다.

“국어 선생님을 짝사랑해서 국문학과로 진학했고, 졸업 이후에는 영화도 제작했고, 음악평론가로도 긴 시간 보내며 잡지·출판, 공연·축제 등 이것저것 다 해봤으니 미술을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문화 분야에 발을 걸쳤습니다. 관심의 스펙트럼이 넓은 편이거든요. 여러 분야에서의 경험과 네트워크가 경기문화재단의 업무에 도움되리라 생각합니다.”

자유로운 영혼이던 그가 어느덧 문화행정가로 자리를 잡았다. 하지만 여전히 대중의 관심은 ‘강헌의 명리학’임을 부인할 수 없다.

“마흔 세 살이던 어느 날 밤, 갑자기 쓰려져 사경을 헤맸습니다. 대동맥 파열이었죠. 꼬박 23일간 혼수 상태에 빠졌다가 기적적으로 살아났습니다. 겨우 깬 사람에게 의사가 ‘일 년 반을 넘기지 못할 것 같다’고 하니 사망선고나 다름없었죠. 절망이라는 단어마저 의미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2년 동안 걷지도 못했고 전남 해남 등지에서 요양생활을 했습니다. 그렇게 누워 있는데, 불현듯 고3 때 대학 입시에 낙방하던 날 만난 친구 아버지의 말씀이 20여 년 만에 생각났습니다.”

친구의 아버지는 부산에서 활동하던 역술가였다. 친구네를 숱하게 들락거렸는데도 그날 처음 마주친 친구 아버지는 “헌아, 니 생일이 언제고?” 물으셨다.

“사흘 뒤 다시오라고 해 갔더니 ‘대학은 내년에 뜻한 대로 가게 되니 편히 살아라, 너는 글을 써서 먹고 살겠다’ 그런 얘기를 하셨어요. 그런데 ‘결혼을 세 번 할 것이고, 42세에 목숨이 경각에 달리게 될 거다. 그걸 넘기면 네가 잘 산다’고도 하셨어요. 누워서만 보내던 어느 날 그 기억이 나 친구에게 연락해보니 아버지는 3년 전에 돌아가셨다고 했습니다. 이혼을 두 번 했고,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온 채 ‘대체 그분은 어떻게 생년월일만으로 열 아홉 살 짜리에게 그런 얘기를 하셨을까’라는 생각에 잠겼습니다. 제가 궁금한 걸 못 참는지라 그때부터 명리학을 공부했습니다.”

한문을 잘 아니 독학에 큰 어려움은 없었다. 목숨이 오락가락하는 지경에 이르니 오히려 비상한 집중력이 더해졌다. 강 대표는 “공부한 지 1년 만에 왜 그 어른이 그런 말씀을 하셨는지 터득하게 됐다”면서 “어쩌면 그때 명리학을 만나면서 덤으로 인생을 더 살게 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강헌 경기문화재단 대표이사 /권욱기자




3년 뒤 걸을 수 있게 됐고 서울 이태원에 작은 와인바를 차렸다. 해방촌이나 경리단길이 ‘뜨기’ 훨씬 전의 일이다. 사사로운 소모임 공간이던 그곳이 명리학 상담으로 입소문이 나 ‘상위 0.1%를 위한 술집’이 됐다. 상담을 계속하는 게 버거워 강연으로 방향을 바꿨고, 교재를 만든다는 생각으로 쓴 ‘명리:운명을 읽다’(돌베개 펴냄)가 소위 대박을 터뜨렸다. 보름 만에 초판 5,000부가 다 팔렸고 두 달 만에 6쇄를 찍었다. 강 대표는 “명리학은 과거의 학문인데 나는 인문사회과학 쪽의 시각이 열려 있어 ‘낫다’는 얘기를 듣는 것 같았다”면서도 한편으로는 “이런 책이 베스트셀러라니 세상에 ‘아픈 사람’이 참으로 많구나” 생각했다고 한다.

강헌의 명리학은 ‘좌파명리학’으로 통했다. 1981년 봄 입학한 서울대에서, 맨 먼저 그를 맞은 것은 ‘입학을 축하합니다’가 아닌 ‘전두환을 찢어 죽이자’는 현수막이었다. 골수 운동권은 아니었지만 상업영화보다는 노동운동영화 쪽이 더 옳은 방향이라고 여겼다. 노무현 대통령 서거 3주기 헌정 음반을 만드는 등 진보적 여러 활동들이 그를 ‘좌파’로 분류하게 한다. 여기서 드는 의문점은 좌파와 명리학의 공존이다.

“저는 운명결정론자는 아닙니다. 그렇게 될 운명이란 건 없어요. 이따금 많은 사람들이 신을 믿듯 명리학을 결정론의 사슬로 만들어 스스로 구금되려고 합니다. 그건 신분 결정론의 시대이던 중세사회에서 생겨난 기존 명리학의 문제고 병폐입니다. 전통 명리학의 근원적 한계지만, 공화정 시대 이후에는 그렇게 적용할 수 없죠. 시대의 패러다임이 바뀌면 학문 또한 그에 따라 당연히 변화해야죠. 중세왕조시대에 탄생한 명리학의 본질은 숙명론이 아니었지만, 시장의 논리가 명리학의 상품적 가치를 드높이기 위해 숙명론을 내세운 것 아닐까요. 네가 모를 뿐 이미 정해진 운명이라고 으름장을 놓아야 대가를 지불할 테니까요.”

강 대표는 냉철한 낙관주의자다. 그는 “좋은 의도가 반드시 좋은 결과를 가져오는 것은 아닌 까닭에 선의지를 크게 믿는 편은 아니지만 인간의 집단지성을 신뢰한다”면서 “지성이 제대로 활동하려면 좀 더 건강하고 행복해야 하는데 그 건강과 행복에 문화가 도움될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말 나온 김에 ‘문화란 무엇인가’ 명리학적으로 설명해달라고 청했다. 웃음을 터뜨리며 “활인(活人)”이라고 답한다.

“살 활(活), 사람 인(人). 명리학으로는 활인, 사람을 살아 있게 하는 것이 문화의 역할이죠. 문화가 없다고 사람이 죽지는 않습니다만, 만약 인간에게 문화가 없으면 살아있으되 죽은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문화가 없었다면 인류는 지금의 수준까지 진화하지도 못했을 겁니다. 나무늘보나 치타 수준에서 멈췄을 테죠.”

그가 경기문화재단으로 온 이유다.
/수원=조상인기자 ccsi@sedaily.com·사진=권욱기자

He is…

△1962년 부산 △1986년 서울대 국문학 학사 △1988년 서울대 음악학 석사 △1992~1995년 장산곶매 대표 △2003~2008년 한국대중음악연구소 소장, 단국대 대중문화대학원 겸임교수 △2012~2017년 성균관대 예술학협동과정 겸임교수 △2015~2016년 황교익·강헌의 맛있는 라디오 진행 △2018년 12월~ 경기문화재단 대표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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