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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의 산물 '소젖'에 근대국가 환상 짜넣은 '우유' [최형섭의 테크놀로지로 본 세상]

<13> 우유

공장에서 바나나맛 우유를 생산하고 있다./사진제공=빙그레




갓 짜낸 소젖 ‘탈지유·크림’으로 분리

지방률 0~4% 조정 후 제품으로 판매

유전·식품공학 등 사실상 기술의 산물

우유에 관한 추억 하나. 지난 1998년 1월 훈련소에 입소했다.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직후라 분위기가 흉흉했다. 훈련병들이야 군대에 막 들어왔을 따름이니 알 도리가 없었지만 기간병들은 불과 몇 개월 사이에 사정이 얼마나 나빠졌는지 가끔씩 이야기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우유 보급이었다. 우리 소대를 담당하던 일병 계급장을 단 조교에 따르면 지난해까지는 훈련병들에게 매일 우유 한 팩씩 지급했다는 것이다. 우리는 고작 일주일에 한 팩씩 받아 마시고 있었다. 매주 월요일 아침에 200㎖짜리 우유가 지급되면 마지막 한 방울까지 꼭꼭 짜내듯 마시곤 했다. 아낄 게 없어서 훈련병 우윳값을 아끼다니. 훈련병들은 분노할 수밖에 없었다. 나라 곳간이 아쉬워지면 가장 취약한 고리부터 피해를 받기 시작한다는 것을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우유에 관한 추억 둘. 제대하고 얼마 안 있어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동네 슈퍼마켓에 가보니 한국에서는 보지 못한 여러 종류의 우유가 있었다. ‘홀 밀크’에서부터 2% 우유, 1% 우유, 탈지유(skim milk) 등 취향에 따라 지방 함량을 선택할 수 있게 돼 있었다. 요즘이야 한국에서도 다양한 저지방 우유가 출시돼 쉽게 구할 수 있지만 당시에는 낯선 풍경이었다. 여러 차례의 실험 끝에 한동안 2% 우유를 마시게 됐다. 저지방 우유에 익숙해지자 곧 ‘홀 밀크’는 부담스러워서 마실 수 없게 됐다. 미국 생활 내내 아침식사로 시리얼을 2% 우유에 타서 먹었다. 사람의 입맛이 생각보다 쉽게 바뀔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우유는 젖소라는 생명이 만들어내는 체액의 일종이다. 우유는 한편으로는 자연의 산물이지만 우리가 소비하는 ‘우유’라는 제품이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수많은 기계장치와 인간의 노동이 개입하게 된다. 테크놀로지를 자연에 인간이 개입해 인공적인 편의를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면 우유는 이에 정확하게 부합한다. ‘홀 밀크’를 직역하면 ‘완전한 우유’가 된다. 이 용어는 자연의 산물인 우유의 성분을 인위적으로 조정하지 않았다는 인상을 준다. 하지만 우리가 마시는 모든 우유는 생산의 첫 단계로 원심분리기라는 기계를 통과하게 된다. 여기에서 탈지유와 크림이 분리된다. 보통은 9대1 정도의 비율이라고 한다. 일단 크림을 분리한 후 표준 조성에 따라 다시 섞는다. 한국의 ‘일반 우유’는 보통 지방률을 4%에 맞춘다. 미국의 ‘홀 밀크’는 3.25%라고 한다. 이렇게 조성에 맞게 섞어준 후 남는 크림은 각종 유제품을 만드는 원료로 활용된다. 즉 우리가 마시는 우유는 자연물이 아니라 인공물에 가깝다.

인류가 소젖을 언제부터 먹게 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인간은 생후 일정 기간 동안 모유에 의존해 생존한다. 원래 대부분의 인간은 6~7세 이후부터 ‘락타아제’라는 유당(乳糖) 분해효소를 체내에서 생성하는 능력을 잃게 된다. 지금은 이것이 유당 불내증(不耐症)으로 알려져 있다. 우유만 마시면 배가 아프고 소화가 잘 되지 않는 현상이 바로 이 때문이다. 그러던 것이 약 7,000년 전에 모종의 유전자 돌연변이가 일어나 유아기가 지난 후에도 락타아제를 원활하게 생성하는 체질의 인간들이 생겨났다. 유당 불내증을 보이는 사람들의 비율은 지역에 따라 큰 차이를 보인다. 최근 연구에 따르면 북유럽의 경우 유당 불내증을 가진 사람의 비율은 10% 전후로 나타난다. 반면 동아시아 지역에서는 그 비율이 여전히 80% 이상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국인이나 일본인이 덴마크나 스웨덴 사람들처럼 우유를 벌컥벌컥 마시는 것은 유전학적으로 적합하지 않을 수도 있다.

이를 포함한 여러 이유로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지역에서 우유는 비교적 늦게 보급된 편이었다. 일본에서는 메이지유신 이후 서구식 근대화를 추진하면서 본격적으로 우유를 마시기 시작했다. 1920년 전후로 일본의 ‘열등한’ 식생활을 개선하려는 식생활 개선 운동이 일어났다. 이를 주도한 경제학자 모리모토 고키치(森本厚吉, 1877~1950)는 세계 인종을 “충분한 우유와 육류를 섭취하는 민족들”과 “(일본인처럼) 결핍된 식품에 의존하는 민족”으로 구분했다. 일본인들이 우유를 비롯한 서구식 식생활을 받아들이면 수명이 늘어날 뿐만 아니라 체위 향상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탈아입구(脫亞入歐)’를 위한 일본인들의 식습관은 식민지 경험을 통해 조선에도 알려지기 시작했다. 곧 한반도에도 우유를 생산해 판매하는 회사가 설립됐다. 그러나 대부분의 한국인에게 우유란 여전히 일본인들이나 마시는 낯선 음식에 머물렀다. 한국에서 우유의 주변적 위치는 해방 이후까지도 한동안 유지됐다.



매일유업이 1973년 국내 최초로 항공기를 통해 수입한 젖소를 하역하고 있다./사진제공=매일유업


‘유당 불내증’ 비중 높은 동아시아선

늦은 보급에 서구식 문화 상징 여겨져

日, 열등한 식생활 개선 운동으로 권장

韓도 ‘조국 근대화’ 목표로 낙농 장려

한국에서 우유 생산이 본격적으로 이뤄지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 이후의 일이었다. 1961년에는 전국에 젖소가 1,000여마리에 불과했다. 그로부터 20년 후 21만마리까지 늘어났다.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대통령은 찢어지게 가난한 농촌 지역에 새로운 소득원을 창출하는 방안의 하나로 낙농업을 적극적으로 권장했다. 우유 생산량이 늘어나자 이를 소비하는 방책 역시 마련해야 했다. 낯선 음식이었던 우유가 한국인의 식생활에 편입되기까지 적응할 시간이 필요했다. 동아시아 지역의 높은 비율로 나타나는 유당 불내증 역시 넘어서야 할 장벽이었다. 정부는 “남아도는 우유”를 소비하기 위한 방안으로 1970년대 초부터 국민학교와 군부대에서 우유 급식을 단계적으로 시작했다. 이를 위해 “국민 체위를 향상”시킨다는 (반세기 전 일본인들의 경험을 연상시키는) 목표가 세워졌다. 이로써 상당수의 한국인들이 우유를 일상적으로 접할 수 있게 됐다.

모든 한국인이 우유를 접할 수 있게 하는 일은 쉽지만은 않았다. 외래종 젖소는 한국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고 폐사하는 경우가 많았다. 새로운 환경에 보다 잘 적응할 수 있는 잡종우를 만들기 위한 노력이 이어졌다. 공장에서 만들어진 우유를 소비자들에게 안전하게 전달할 수 있는 유통 인프라를 구축하는 일 역시 중요했다. 상온에서 상하기 쉬운 우유의 특성상 멸균 상태에서 바로 진공포장을 하는 방법이 도입됐다. 중년 이상의 독자라면 정사면체 모양의 ‘테트라팩’ 포장을 기억할 것이다. 이렇게 생산된 우유는 1970년대를 거치면서 확충된 전국 도로망을 따라 전국의 가정으로 배달되기 시작했다. 이렇듯 우유는 유전학, 식품공학, 도로망 확충 등 여러 테크놀로지의 개입을 거친 후에야 비로소 우리 생활에서 일상적으로 볼 수 있는 식품으로 자리잡았다.

무엇보다도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지역에서 우유는 근대 국가 건설과 직결돼 있는 물건이었다. 20세기 초 일본인들이 우유에 집착했던 것은 그것이 ‘선진적’인 서구적 식생활을 상징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우유 섭취를 장려하는 일은 부국강병을 목표로 하는 국가가 마땅히 맡아야 하는 임무가 됐다. 그로부터 반세기 이후 한국에서는 ‘조국근대화’를 목표로 삼은 국가가 낙농업을 적극적으로 장려했고 그로 인해 급증한 우유 생산량을 소비하기 위해 학교와 군대에서 급식을 실시하기까지 했다. 이런 면에서 우유는 국가가 국민의 신체에 직접 개입해 국력을 신장시킬 수 있다는 믿음을 상징하기도 한다. 유당 불내증이 높은 비율로 나타나는 지역의 국민들이 국가 발전을 위해 의식적으로 우유 섭취를 늘려야만 했던 20세기의 풍경이다. 이러한 역사를 알고 있었다면 IMF 구제금융 직후 비용 절감을 이유로 훈련병들에게 지급하던 우유를 대폭 삭감하는 치사한 결정을 내리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서울과기대 교수·과학잡지 ‘에피’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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