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점심은 막내가 먹고 싶은 걸로 맘대로 정해”
대한민국 신입사원들에게 가장 난감한 순간, 점심메뉴 정하기. 모든 팀원들의 입맛을 충족시키면서 가성비 높은 메뉴와 분위기 좋은 장소로 식사를 골라야 하는 압박감에 식은땀이 흐른 경험, 한 번쯤 있죠? 실제로 직장인들의 점심이라면 군기 바짝 든 막내 신입부터 김 대리, 이 과장, 박 부장까지 다 함께 둘러앉아 부대찌개로 수저를 향하는 모습이 먼저 떠오르실 것 같은데요.하지만 강산이 바뀌는 동안 우리네 아침 식탁이 180도 바뀌었듯 직장가의 점심 풍경도 사뭇 달라지는 모습입니다.
다이어트를 하겠다며 도시락을 싸와 혼밥을 하는 김 대리, 점심을 활용해 영어 공부를 하겠다며 식사는 따로 하겠다는 이 대리, 밥 대신 잠이나 자겠다며 부장님과의 식사도 거절하는 박 과장까지… ‘근무의 연장선’으로 여겨지던 점심시간을 ‘휴식을 위한 쉼표’, ‘자기계발을 위한 시간’으로 바꾸고 있는 직장인들. 우리의 점심 풍경은 대체 왜 이렇게 달라진 걸까요.
■‘월급빼고 다 오른다’ 점심 1만원 시대에 대처하는 직장인의 자세
‘마음의 점을 찍는다’는 뜻의 ‘점심(點心)’은 원래 아침과 저녁 사이 배고플 때 틈틈이 챙겨 먹는 간식이었습니다. 산업화 시대에 기업의 출퇴근 문화가 사회 전반에 자리 잡히면서 비로소 한 끼 식사로 통용되기 시작했죠. 즉 직장생활과 함께 탄생한 점심은 직장인들에게 일명 ‘본투비(Born to be) 동반자’ 인 셈입니다. 이 때문에 업무도 식후경이라고 ‘뭘 먹어야 잘 먹었다고 소문날까’ 행복한 고민을 하는 직장인들이 늘어났죠.
그러나 최근 직장인들에게 점심은 한 끼 식사보단 ‘먹은 셈 치고 건너뛰는’ 과거 간식 개념의 점심으로 다시 회귀 중입니다. 직장인들의 유일한 낙인 점심 식탁이 소박해진 데에는 경기 불황과 물가 상승으로 얇아진 주머니 사정 탓이 큰데요. 실제로 직장인 10명 중 무려 7명(77.4%) 이상이 구내식당이나 도시락을 찾고 있는데 이는 ‘점심 식사 비용 절감’(42.6%) 때문이라고 합니다.
점심 물가는 매해 증가해 ‘1만원 시대’를 맞이한 반면 직장인 평균 점심 지출액은 하락하고 있죠.
이 때문에 직장인들은 1만원 가량의 점심 한 끼를 반값 수준인 5,000원선에 즐길 수 있는 편의점, 구내식당으로 몰려가는 모습입니다. 이러한 추세를 반영해 편의점 업계에선 하루가 멀다 하고 도시락, 샌드위치 등 신제품을 쏟아내는 동시에 밀려드는 직장인들을 수용할 공간 확장에 열을 올리고 있죠. 또 구내식당 역시 정해진 메뉴를 배식하는 과거 급식형 분위기에서 뷔페식 혹은 셰프가 직접 조리하는 프리미엄 배식형 등으로 진화하고 있습니다.
얇아진 지갑 두께에 엥겔지수부터 쥐어짜는 직장인들이 있는가 하면 웃돈을 주고서라도 ‘퀄리티’있는 점심 식사를 빠르게 즐기려는 직장인들도 속속들이 등장하고 있는데요. 강남·종로·여의도 등 직장 일대 정해진 장소에서 샐러드나 샌드위치를 배송받는 신선 배송 서비스와 매일 다른 반찬의 한식 도시락을 정기배송하는 서비스가 직장인들 사이에서 입소문을 타고 확산 중입니다. 또 30분씩 줄서서 먹어야 하는 맛집 음식도 배달 앱을 통해 클릭 한 번하면 사무실에서 간편 신속하게 받아볼 수 있죠. 특히 최근엔 간편하면서도 건강을 고려한 스내킹(Snacking·샐러드, 샌드위치 등 가벼운 식사를 뜻하는 식문화 트렌드)콘셉트를 도입한 음식점들도 직장인들의 발길을 붙잡고 있습니다.
■‘점심 뭐 먹지?’는 옛말 ‘점심에 뭐 하지?’가 대세… ‘아싸’ 자처하는 직장인들
점심 ‘메뉴’보다 점심 ‘시간’이 더 중요해진 직장인도 대폭 늘어나는 추세입니다. 아침을 먹지 않은 탓에 점심 끼니를 거를 수는 없지만 ‘빨리 식사를 마치고 잔여 시간을 확보하자’는 뚜렷한 목표를 가지고 움직이는 사람들이죠. 실제로 직장인의 10명 중 5명은 ‘대충 끼니를 때우고’ 다른 일을 하며 점심시간을 채우고 싶어 했는데요. 그 중 단연 1위는 ‘휴식’이었습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두 번째로 긴 ‘피로사회’를 사는 직장인들에게 점심시간은 하루 중 잠시 숨을 돌릴 수 있는 오아시스인 셈입니다.
최근 직장가 일대를 봐도 백반집 대신 낮잠카페, 스크린야구장, 레트로 게임장 등이 우후죽순 생겨나고 있는데요. 과도한 업무에서 잠시 벗어나려는 직장인들의 욕망에서 비롯됐다는 분석입니다. 대한민국 직장인들에게 보약은 더 이상 ‘밥’이 아니라 ‘휴식’이라는 의미겠죠. 이들은 2040법칙에 따라 식사는 20분 안에 마치고 나머지 40분을 휴식에 투자한다고 합니다.
온전히 쉼표로서 점심을 보내는 직장인과는 정반대로 점심시간마저 미래를 설계하는 데 투자하려는 샐러던트(직장인과 학생의 합성어)도 늘어나고 있습니다. 하루에 1시간, 한 달이면 20시간, 1년으로 계산하면 무려 240시간에 달하는 점심시간 동안 밥 먹고, 커피 마시며 배를 채우는 대신 배움의 양식으로 머리를 채우겠다는거죠.
실제로 여의도, 종로 일대 학원가에선 점심특강반이 가장 먼저 마감될 정도로 ‘공부하는’ 직장인들로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습니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과·차장급이 주로 분포돼 있는 40대의 10명 중 3명(29%) 가량이 점심시간에 자기계발을 하고 있다는 것인데요. 조직·집단보다 ‘나’를 더 중시하는 밀레니얼 세대의 직장인뿐만 아니라 고참 상사도 ‘자신을 위한 투자’에 발벗고 나섰다는 겁니다. 학원가 중심으로 불타오른 직장인의 학구열은 도서 출판업계에도 퍼져 ‘어학·교육 분야’의 주요 소비층으로 부상했습니다.
또 하루 종일 책상 앞에 앉아 생활하는 일명 호모 오피스쿠스족들도 이제 점심시간만큼은 운동, 산책 등에 시간을 할애하며 활동적으로 보내고 있는데요. 특히 혼자 걸으면서 생각을 정리하고 건강까지 챙길 수 있는 워런치 문화(워킹과 점심의 합성어)는 직장인의 필수 점심 코스로 자리 잡았습니다. 사무실 안에서는 업무에, 집에서는 가족과의 대화에 몰두해야 하는 직장인들에게 점심 산책은 하루 중 유일하게 생각을 정리하는 기회가 된 셈입니다.
■‘피로사회·무한경쟁’이 부른 대한민국 점심 자화상
아침에도 점심에도 ‘시간’에 쫓기며 식탁을 위협받는 대한민국 직장인들. 그들이 밥그릇 대신 휴식 혹은 책을 찾게 된 것은 한국 특유의 무한경쟁 문화가 밥상에 투영됐기 때문인데요. 치열한 입시 전쟁을 통해 명문 학교 타이틀을 얻어 좋은 직장에 입사하고 무난하게 승진 코스를 밟아 노후에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목표인 모든 직장인에게 ‘밥’은 그저 끼니 이상의 의미를 갖지 않게 된겁니다. 먹고 살기 위해 고군분투하면서도 정작 먹는 것이 뒷전이 된 오늘날 현대인의 식탁 풍경을 보면 씁쓸한 한숨이 절로 나옵니다.
아침 못 먹는 ‘삼시 두끼 사회’, 한 설문에 따르면 아침·점심·저녁 중 한 끼만 챙겨 먹으라고 묻는다면 직장인의 대다수(64.4%)가 ‘점심’을 꼽았는데요. 밥심이 진정 직장인들에게 ‘하루 일과 중 활력소’로 발휘될 수 있는 그 날이 오길 기대해 봅니다.
/정가람기자 garamj@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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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편의점 도시락부터 카페 브런치, 패밀리 레스토랑, 배달 음식까지 다양한 선택지 속에서 우리는 매일 ‘오늘 뭐 먹을지’ 고민합니다. 삼시세끼 먹거리를 고르는 일은 누군가에겐 소소한 즐거움이기도, 또 귀찮은 일이기도 하겠죠.
그런데 생각해보면 식량이 부족하던 시대에서 먹거리가 넘쳐나는 시대로 바뀌는 데 반세기도 걸리지 않았습니다. 먹는 것이 곧 ‘생존’이던 시대에서 이제는 ‘당신이 먹는 것이 곧 당신(You are What you eat·YAWUE)’이라며 먹는 것 하나에도 큰 의미를 두는 시대로 접어들게 된 거죠. 불과 몇 십 년 사이 우리의 식생활은 그야말로 드라마틱하게 변했습니다. 특히 언젠가부터 TV와 유튜브 등에서 복붙이라도 한 듯 ‘먹방 콘텐츠’가 쏟아지고 젊은 세대의 시청률도 꾸준히 느는 걸 보면 먹는 것에 대한 현대인들의 새로운 욕구가 드러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과거보다 훨씬 풍족한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갈수록 왜 먹는 것에 더 집착하게 됐을까요? 썸오리지널스는 삼시 세끼에 간식을 더한 ‘아침·점심·저녁·간식’ 네 파트로 나눠 각 끼니별 특성에 따라 시대별로 바뀌어온 라이프 트렌드 전반을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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