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구 명예회장의 교사 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당시 구 명예회장이 발령받은 소학교의 일본인 교장이 일본에 기증할 경전투기 구입 건으로 구 명예회장의 부친이자 당시 구인상회를 운영하던 구인회 사장에게 기부를 요청했다가 거절당한 적이 있어 구 사장과 사이가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구 명예회장은 학교 출근 첫 날부터 일본인 교장과 일본인 교사들로부터 냉대를 받았다. 구 명예회장은 이 같은 차가운 분위기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느니 차라리 고향에서 농사를 짓는 게 낫겠다고 생각해 다음날부터 아예 출근을 포기하고 귀향했다. 구 명예회장은 귀향해 감나무와 복숭아나무를 가꾸고 있던 차에 마침 모교였던 지수초등학교 교사로 다시 발령받아 낮에는 학생들을 가르치고 퇴근 후에는 농사일에 몰두하는 생활을 시작했다. 구 명예회장은 지수초등학교에서 2년, 부산사범부속초등학교에서 3년을 교직에 몸담았는데, 무엇보다 학교 규율을 세우는 것을 우선시하여 ‘호랑이 선생님’이라는 별명도 붙었다.
교사로 재직 당시 구 명예회장은 미래에는 기술이 모든 것에 우선하는 시대가 틀림없이 올 것이라 믿고 교육의 중점목표에 기술력 양성을 넣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에 구 명예회장은 수시로 학생들에게 “나라가 힘이 강해지려면 기술이 발전해야 한다. 그러니 훌륭한 기술자가 많이 나와야 한다”며 기술의 중요성에 대해 강조하곤 했다.
관련기사
구 명예회장은 교사로 근무 중이던 1947년 부친이 LG의 모기업인 락희화학공업사(현 LG화학)를 설립해 럭키크림 화장품 사업을 시작하면서 사업이 날로 번창해 일손이 모자라자 낮에는 교사로 일하고 밤에는 부친의 사업을 돕기 시작하면서 기업 경영을 배우기 시작했다. 이후 LG 창업주인 연암 구인회 회장이 1969년 타계함에 따라 구 명예회장은 45세가 되던 1970년 1월 9일 LG그룹의 2대 회장으로 취임했으며, 재임 기간 동안 LG의 매출액을 1,000배 이상 성장시키며 대기업으로 키워냈다.
/고병기기자 staytomorrow@sedaily.com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