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테헤란로에는 한국을 대표하는 1세대 건축가인 고(故) 김수근 씨와 그의 제자들이 설계한 건축물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옛 르네상스 호텔이 바로 김수근 씨가 설계한 건축물이었다. 1988년 완공된 이 호텔은 김수근 씨가 세상을 떠나기 1년 전인 1985년 병상에서 스케치한 마지막 작품 중 하나로 그의 유작이다. 김수근 씨는 르네상스 호텔을 중심으로 테헤란로라는 공간의 정체성을 만들고 그 맥락을 잇고자 했다. 실제 강남 테헤란로와 언주로가 만나는 교차로인 르네상스호텔 사거리에는 서로 닮은꼴의 건축물 세 개가 사이 좋게 자리 잡고 있었다. 르네상스 호텔과 바로 뒤편에 위치했던 삼부 오피스 빌딩, 그리고 언주로를 사이에 두고 맞은편에 위치한 서울상록회관이다. 이 세 건축물은 건물 모서리가 곡선 형태로 외관이 유사했다. 특히 직사각형 모양의 막대그래프를 닮은 테헤란로 일대 빌딩들과는 확연하게 구분되는 모습이었다. 르네상스호텔과 삼부 오피스 빌딩, 서울상록회관이 닮은꼴로 설계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 세 건축물은 모두 김수근 씨와 그의 제자들의 설계한 작품이다. 삼부 오피스 빌딩은 김수근 씨에 이어 ‘공간(空間)’을 이끈 2대 대표이자 그의 제자인 고 장세양 씨가 설계해 1992년에 준공되었으며, 서울상록회관은 승효상 씨가 설계해 1991년 준공한 건물이다.
당시 김수근 씨와 그의 제자들은 지금과는 다른 테헤란로의 미래를 꿈꿨다. 실제 르네상스 호텔이 들어선 1980년대 후반만 하더라도 테헤란로는 지금과 같은 모습이 아니었다. 올림픽이 열리던 해인 1988년 올림픽 개최를 불과 3개월여 앞두고 문을 연 지하 2층·지상 24층 규모의 르네상스 호텔은 당시 테헤란로 일대에서 가장 화려한 건물이었다. 서울상록회관과 삼부 오피스 빌딩이 준공될 당시만 하더라도 테헤란로 대로변에는 지금과 같은 대형 빌딩들이 많지 않았다. 이에 김수근 씨와 그의 제자들은 르네상스호텔과 같은 부드러운 곡선 형태의 건물들이 테헤란로의 상징이 되기를 바랐다
하지만 이후 테헤란로 일대에 특징 없는 직사각형 모양의 빌딩들이 대거 들어서면서 김수근 씨가 꿈꿨던 도시도의 맥락이 이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애초 김수근 씨의 생각과는 반대로 르네상스 호텔과 서울상록회관, 삼부 오피스 빌딩이 테헤란로에 어울리지 않는 외딴 섬과 같은 존재가 되어 버렸다.
그리고 이제 그마저도 사라져 가고 있다. 모기업인 삼부토건이 경영난으로 무너지면서 르네상스호텔과 삼부 오피스 빌딩이 매각된 후 철거되고 현재 재개발이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서울상록회관만 쓸쓸히 남아 건축가 김수근이 꿈꿨던 미래 도시 테헤란로의 흔적을 보여주고 있다.
/고병기기자 staytomorrow@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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