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연금기금운용위원회가 주주권 행사 가이드라인을 최종 의결한 27일. 사용자단체 대표로 기금위에 참석했던 3명의 위원 가운데 2명은 아예 참석하지 않았다. 기금위가 의결권을 쥐고 있는 사용자단체는 한국경영자총협회와 대한상의·중소기업중앙회 등 세 곳이다. 나머지 한 곳도 논의 과정에서 주무부처인 보건복지부가 강행 의지를 내비치자 결국 회의 말미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전국경제인연합회는 “기금 조성의 핵심주체인 기업의 의견을 묵살하는 가이드라인 내용도 문제지만 기금위의 일방적인 밀어붙이기식 강행 절차에 우려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며 강한 유감을 표했다.
경영계가 우려하는 것은 크게 네 가지다. 우선 검찰 등 수사기관이 횡령, 배임, 부당지원, 경영진의 사익 편취 등의 위법행위가 있다고 판단한 기업의 이사 해임을 요청할 수 있도록 한 조항이다. 유죄 확정판결이 나지 않은 상황에서 검찰 기소만으로 해임을 요구하는 것은 헌법의 ‘무죄 추정의 원칙’에 위배된다는 게 경영계의 주장이다. 이 같은 내용은 올해 초 한진칼 주주총회에서 국민연금이 행사했던 주주권보다 한발 더 나아간 수준이다. 당시 국민연금은 조양호 전 한진칼 회장이 배임·횡령 등으로 형이 확정될 경우 이사직이 자동 박탈되도록 정관을 바꾸자는 내용을 골자로 한 정관변경을 제안했다. 경영권 개입의 첫 사례였다. 물론 정관변경안은 주총에서 통과되지 못했다.
복지부는 이에 대해 국민연금이 ‘주주’인 만큼 상법에 위배 되지 않는다는 입장이다. 박능후 복지부 장관은 “투자자 입장에서 유죄 확정은 중요하지 않고 그 사안으로 기업의 주주가치가 훼손됐느냐가 중요하다”며 “그 상황만으로도 투자를 재검토하고 대응 방안을 요구할 수 있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감사위원 선임과 배당정책을 두고 국민연금이 집중투표를 할 수 있도록 정관을 변경 가능하게 한 조항도 우려가 큰 부분이다. 집중투표제는 주주총회에서 선임되는 이사의 숫자만큼 주주에게 의결권을 부여하는 제도다. 선임되는 이사가 3명이면 1주당 총 3표를 갖게 되는데, 이 표를 한 후보에게 몰아줄 수 있다. 현행 상법도 이 집중투표제가 경영권을 위협할 수 있어 기업이 이를 배제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실제로 지난 2006년 ‘기업 사냥꾼’으로 불렸던 칼 아이컨이 KT&G의 경영권을 위협할 수 있었던 것도 이 집중투표제를 통해서였다. 복지부는 이 역시 상법과 충돌하지 않는다는 입장이다. 상법(제382조의 2)은 ‘2인 이상 이사를 선임할 때 주주는 정관에서 달리 정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집중투표로 이사를 선임할 것을 청구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원칙적으로 집중투표제를 채택하되 예외적인 경우에만 정관을 변경해 배제할 수 있다는 것이다.
경영계는 감사위원 분리선임안과 의결권 대리행사 권유(위임장 경쟁) 등도 기업의 경영권을 위협할 수 있다며 보완을 요청해왔다. 다만 ‘예상하지 못한 우려 사안’으로 분류했던 환경·사회책임·지배구조(ESG) 평가등급 하락은 ‘중점관리 사안’으로 변경하고 국민연금의 주주활동 목적이 기금의 장기수익 및 주주가치 제고라는 점을 명확히 규정하는 등의 내용에는 경영계의 의견이 일부 반영됐다.
수정안에는 또 수탁자책임활동기간을 단축하거나 바로 다음 단계로 이행할 수 있는 내용도 들어갔다. 가이드라인에는 주주권 행사를 위해서는 ‘비공개 대화→비공개 중점관리→공개 대화→주주권 행사’의 단계를 밟는다. 초안에서는 각 단계별로 1년의 기한을 두기로 했는데 신속한 의사결정이 어렵다는 시민단체 등의 의견을 받아들여 이 조항을 수정한 것이다.
대한상공회의소는 이번 결정을 두고 “기업 경영에 심각한 위협을 주는 특정 이사 해임, 집중투표제 도입, 감사위원 분리선임 등을 제안하고 위임장 경쟁까지 할 수 있도록 하면서 별도의 통제장치를 마련하지 않았다”고 우려했다.
복지부는 두 차례에 걸친 의견수렴을 통해 수정·보완한 안인 만큼 ‘선시행 후보완’하겠다는 입장이지만 경영계의 반발이 거세 당분간 진통이 지속될 것으로 예상된다. 박 장관은 “주주권 행사 지침이나 내용은 재계와 대화해나가겠다”고 말했다.
/김상훈기자 ksh25th@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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