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2월2일 네덜란드의 수도 암스테르담에서 기차를 타고 1시간20분 가까이 남쪽으로 달려 에인트호번역에 도착했다. 우리에게는 ‘캡틴 박’ 박지성 선수가 뛰었던 축구팀의 연고지로 잘 알려져 있지만 글로벌 반도체 업계에서는 가장 몸값이 비싼 공학도들이 모이는 도시로 더 유명하다. 다시 차로 20분을 달려 도착한 펠트호번. 유럽의 흔한 소도시로 보일 수 있지만 이곳은 삼성전자도, 인텔도, 대만의 TSMC도 무시할 수 없는 반도체 산업의 핵심지역이다. 바로 글로벌 반도체 장비 분야에서 독보적인 영역을 구축한 ASML의 본사가 펠트호번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ASML은 최근 삼성전자에 한 대에 1,500억원에 달하는 극자외선(EUV) 노광장비를 대거 공급하면서 주목을 받았다. EUV 노광장비를 만드는 곳은 전 세계에서 ASML이 유일하다. 옆 동네인 에인트호번은 전장 반도체 분야 1위인 NXP가 탄생한 곳이다. 네덜란드가 자랑하는 ASML이 만드는 최첨단 반도체 장비와 NXP의 전장 반도체는 메모리반도체에서 초격차 전략을 펴고 있는 한국의 미래산업이기도 하다. 네덜란드는 한국과 마찬가지로 국토가 작고 부존자원이 많지 않은 나라다. 한국 국토 면적의 5분의1에 불과한 네덜란드에서도 소도시인 에인트호번과 펠트호번에서 이처럼 세계적인 반도체 기업이 탄생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일까.
ASML 본사 익스피리언스센터(Experience Center)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었다. 익스피리언스센터에는 ASML의 대표제품인 EUV 노광장비에 들어가는 주요 부품들을 전시하고 있다. ASML 본사가 아니라 마치 부품 협력사(supplier) 홍보전시장으로 착각하게 만들 정도로 다양한 부품이 전시돼 있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제품은 독일 광학 업체 칼자이스가 만든 미러(거울) 부품이다. 미러는 EUV의 핵심부품이다. 노광 공정은 빛을 이용해 웨이퍼에 회로를 그리는 작업인데 EUV는 기존에 사용하던 불화아르곤(ArF)보다 파장이 짧아 훨씬 미세하게 회로를 그릴 수 있다. 문제는 자연 상태에서 EUV가 쉽게 사라지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칼자이스에서 만든 미러는 이런 약점을 보완해 EUV의 빛을 반사시켜 웨이퍼까지 도달하게 한다. EUV에는 칼자이스의 미러가 10개 이상 들어간다.
필립스 리서치 랩 출신으로 지난 1997년부터 ASML에서 근무하고 있는 요스 벤스호프 기술 담당 임원은 “가장 중요한 것은 ‘생태계(eco system)’”라며 “경쟁이 치열한 시장에서 한발 앞서나갈 수 있었던 핵심 경쟁력 가운데 하나가 바로 칼자이스와 같은 유능한 파트너들의 존재”라고 말했다. 그는 ASML이 2003년께 반도체 노광 공정 분야에서 한 획을 그으며 큰 성공을 거뒀던 ‘이머전’을 예로 들었다. 이머전은 ASML이 처음으로 경쟁자들을 한발 앞서가는 계기를 만들어준 제품으로 꼽힌다. 이머전을 출시할 당시 ASML은 경쟁자였던 일본의 니콘을 완전히 따돌렸다. 벤스호프 기술 담당 임원은 “경쟁자들도 이머전에 대한 아이디어를 가지고 있었지만 우리는 칼자이스를 비롯해 오랜 신뢰관계를 구축한 협력사들과 제품을 개발하는 과정에서 수시로 피드백을 주고받으며 제품을 개선해나갔다”며 “우리가 만든 생태계는 경쟁자들을 앞서는 데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강조했다. 실제 ASML과 칼자이스가 1984년부터 파트너십을 체결하고 함께 제품을 개발하고 있다. 이처럼 ASML은 네덜란드뿐 아니라 인근 독일·벨기에의 부품 협력사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제품을 개발하고 있다. ASML이 자랑하는 EUV 장비 한 대에 들어가는 부품을 생산하는 협력사만도 900여개에 달한다.
ASML가 자랑하는 생태계는 국내 반도체 산업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삼성전자·SK하이닉스 등 국내 반도체 기업들은 최근 생태계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뼈저리게 깨닫고 있기 때문이다. 국내 반도체 회사들은 올해 한일 관계가 경색되면서 일본으로부터 수입되는 반도체 핵심 3대 소재 확보에 어려움을 겪었다. 또한 삼성전자는 지난 4월 ‘반도체 비전 2030’을 발표하면서 시스템반도체 육성에 박차를 가하고 있지만 파운드리 1위인 대만 TSMC를 추격하는 것이 만만치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미디어텍과 같은 경쟁력 있는 팹리스(반도체 설계회사)가 많은 대만과 달리 국내는 팹리스 생태계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실제 IC인사이츠에 따르면 지난해 대만 팹리스 업체들의 글로벌 시장점유율은 17%로 미국(69%)에 이어 2위를 차지했지만 한국은 1%도 채 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삼성전자·SK하이닉스 등 국내 반도체 기업들도 메모리를 벗어나 시스템반도체 등으로 초격차를 확대하기 위해서는 우리만의 생태계를 갖춰야 한다.
아울러 반도체 산업은 산학협력의 정수로 꼽힌다. ASML의 경쟁력 가운데 하나도 바로 세계 일류 반도체 연구기관과의 협업이다. 벨기에에 위치한 아이멕(IMEC)이 대표적이다. 에인트호번에서 차로 불과 한 시간 떨어져 있는 아이멕은 전 세계 반도체 산업의 기술을 선도하는 곳으로 ASML이나 NXP도 아이멕과 함께 반도체 핵심기술을 개발하고 있다. 아이멕뿐 아니라 에인트호번공대, 독일의 아헨공대 등 유수의 연구기관들이 인근에 위치한다. 벤스호프 기술 담당 임원은 “로컬 연구기관, 로컬 협력사, 로컬 고객이라는 탄탄한 생태계가 존재했기 때문에 글로벌한 고객을 가진 회사로 성장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루벤 포크마 브레인포트 디벨롭먼트 국제사업개발 담당은 “아인트호벤에는 하이테크 기업들에게 중요한 협력사들이 차로 한 시간 이내 거리에 대부분 있다”며 “뿐만 아니라 차로 15분 이내의 거리에 20여개의 주문자부착생산(OEM) 공장과 5개의 캠퍼스, 제품을 테스트하기 위한 시설 등 생태계가 잘 갖춰져 있다”며 ASML이나 NXP와 같은 세계적인 반도체 기업들이 나올 수 있었던 배경을 설명했다. 벤스호프 기술 담당 임원도 “사람과 테크놀로지를 연결하는 것이 핵심”이라고 강조했다
ASML과 NXP는 모두 아인트호벤을 기반으로 구축된 생태계를 기반으로 성장한 회사들이지만 성공 방정식은 사뭇 달랐다. ASML이 노광 장비라는 한 제품의 경쟁력 강화에 집중했다면 NXP는 시장 상황에 유연하게 대처하면서 발 빠르게 인수합병(M&A)을 추진하면서 성장했다. 벤스호프 기술 담당 임원은 “ASML의 성공 비결은 오직 한 분야에 집중했기 때문”이라며 “매우 위험하기도 하지만 반드시 성공을 해야 했기에 동기 부여가 됐다” 고 말했다. 실제 그간 ASML의 인수합병(M&A도 노광 기술이라는 핵심 역량을 강화하기 위한 방향으로 진행되어 왔다. ASML이 2007년에 인수한 브라이언 테코놀로지는 노광 전 디자인 단계에서 모델링을, 가장 최근인 2016년에 인수한 HMI는 10나노 이하 패턴에 대한 계측 기술을 보유하고 있는 회사다. 벤스호프 기술 담당 “ASML이 노광 장비 분야에서 최초의 기업은 아니지만 오직 노광 장비 한 분야만 집중했던 것은 무어의 법칙을 구현하기 위해 속도를 내는 고객의 수요에 발맞춰 빠르게 제품을 개발하고 생산하기 위함”이라며 “고객이 원하는 솔루션을 만들기 위해 계속 노광에 집중하고 있으며 M&A도 노광 기술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한 차원”이라고 강조했다. 고객들도 이 같은 ASML의 연구개발(R&D) 역량에 신뢰를 보여줬다. EUV가 대표적이다. ASML은 EUV R&D를 위해 삼성전자를 비롯해 대만의 TSMC, 인텔로부터 투자를 받은 바 있다. 반면 NXP는 지속적인 M&A를 통해 지속적으로 포트폴리오에 변화를 주면서 성장해 왔다. NXP는 지난 5월에도 마벨의 무선랜 사업을 17억 6,000만달러에 인수했다. NXP가 이처럼 M&A를 통해 적극적으로 나서는 것은 끊임없는 포트폴리오 혁신을 통해 성장 동력을 찾기 위함이다. 실제 NXP는 전장 반도체 분야 1위로 잘 알려져 있지만 전장(48%)뿐만 아니라 산업용&IoT(19%), 모바일(12%), 통신 인프라(19%) 등 다양한 분야에서 경쟁력을 갖추고 있다.
/펠트호번=고병기기자 staytomorrow@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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