쏜살같이 지나가버리는 연말연시의 시간을 이정은(24·대방건설)은 누구보다 길게 쓰고 있다. 땅끝마을로 유명한 전남 해남에서 먹고 자면서 오전6시부터 오후6시께까지 주 6일씩 ‘지옥훈련’을 한다. 고교 시절부터 벌써 7년째. 미국여자프로골프(LPGA) 투어 최고 메이저대회 US 여자오픈 우승과 신인상 수상으로 ‘급’이 달라졌지만, 이정은의 겨울은 ‘골프로 먹고살기’를 목표로 몸부림쳤던 열일곱 시절과 똑같다. 트레이닝복 차림의 이정은은 “겨울 해남 체력훈련은 이제 제 루틴과도 같다”며 환하게 웃었다.
경자년 새해를 자신의 해로 만들기 위해 훈련장 이곳저곳을 부지런히 헤집고 다니는 ‘쥐띠 골퍼’ 이정은을 지난 연말 만났다. 인터벌 트레이닝 등 1시간30분의 러닝 운동에 이어 2시간30분의 샷 연습을 마친 그는 운동장의 계단을 한 번에 서너 칸씩 오르고 또 오르며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이렇게 실외와 실내로 나눠 오후 체력 훈련에만 4시간 가까이 매달린다. 이정은은 우승 때 흘렸던 눈물처럼 그칠 줄 모르는 땀방울에 인상을 찌푸렸다가도 뿌듯한 하루의 결실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보였다.
상금왕·평균타수 1위 2연패로 국내 무대를 평정한 뒤 미국으로 건너간 이정은은 2019년 LPGA 투어 첫해에 상금 3위(약 205만달러), 올해의 선수 포인트 3위에 올랐다. 우승상금이 100만달러인 US 여자오픈을 ‘러키 식스’ 별명처럼 6언더파로 역전 우승했고, 2위와 2배 이상 포인트 격차로 신인상 타이틀을 조기에 확정했다. 25개 출전 대회에서 톱10에 열 번 드는 동안 컷 탈락은 단 두 번일 정도로 신인 같지 않은 꾸준함을 뽐냈다.
지난해 이정은을 채찍질했던 세 글자가 ‘신인왕’이었다면 새해의 세 글자는 ‘올림픽’이다. 몇 달 전 유럽 대회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스위스의 올림픽 박물관에 들러 올림픽 메달에 대한 각오도 다졌던 그다. 세계랭킹 7위인 이정은은 랭킹을 잘 유지하면 올여름 올림픽에 나갈 수 있다. 그는 “LPGA 투어 진출을 앞두고 확실한 목표를 세워놓지 못하고 운동한 기간이 있었는데 그때 굉장히 힘들어했던 기억이 있다”며 “지금은 올림픽이라는 분명한 목표가 생겨 훈련도 더 잘 되는 느낌이다. 전반기에 성적을 확실히 내야 도쿄에 갈 수 있다는 생각으로 정말 집중해서 쳐볼 계획”이라고 힘줘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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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중순부터 4주 일정으로 해남에서 합숙 훈련 중인 이정은은 이후 태국으로 이동해 2~3주간 샷 훈련을 한 뒤 2월 호주 대회부터 새 시즌에 뛰어들 계획이다. 스쾃 운동으로 85㎏까지 드는 그는 계획한 운동의 마지막 한두 개를 남기고 포기하고 싶을 때 “제가 현재 세워놓은 높은 목표와 저를 바라보면서 행복해하고 응원해주는 가족을 떠올린다”고 했다. 골프 하는 친구·후배들과 함께하는 합숙 훈련이라 “다 같이 운동하면 더 힘도 나고 재밌는 추억도 된다”고 한다. 이정은은 2019년의 마지막 날도 똑같이 훈련했고 새해 첫날에는 훈련장 주변 산에 올라 해돋이를 봤다.
쥐띠인 이정은에게 12년 전 쥐띠 해의 기억을 묻자 “그때는 골프 그만두고 공부하고 있을 때”라며 빙긋이 웃었다. 그는 넉넉잖은 가정 형편을 걱정해 당시 3년간 골프를 중단했다. 그러다 레슨프로로 생계를 돕겠다는 생각으로 다시 골프채를 잡고는 이 자리까지 왔다. 최근 박인비·신지애·최나연·이보미 등 선배들과 뜻을 모아 무료급식 봉사와 후원금 전달로 뜻깊은 시간도 보냈다. “언니들이 골프 선수 이정은이 아니라 한 사람의 여자로서 살아가는 것에 대해 많이 조언해줬다”고 한다.
이정은은 올해 투어 목표로는 3승을 잡았다. “첫해 두세 번은 더 있었던 우승 기회를 놓친 게 아쉽다. 충분히 우승할 수 있는 위치에서 체력 고갈 탓에 치고 올라가지 못한 8월 스코틀랜드 여자오픈(공동 2위)이 특히 그렇다”는 설명이다. 새 시즌에는 출전 대회 사이의 휴식 기간을 1주에서 2주로 늘려 3~4개 대회에 연속 출전하면 2주간 쉬는 패턴으로 일정을 짤 계획이다. 합숙 훈련에 들어가기에 앞서 30여명의 친구들을 초대해 파티도 열었던 이정은은 “새해에도 뚜렷한 성적을 내서 연말에 파티를 여는 게 목표”라고도 했다.
한 가지 더 있다. 첫해에 통역을 통했던 언론 인터뷰를 영어로 소화해내는 것이다. 이정은은 “신인상 수상 연설을 하러 연단에 오를 때 (여자골프 전설) 안니카 소렌스탐이 귓가에 덕담을 해줬는데 제대로 알아듣지 못해 너무 아쉬웠다”면서 “인터뷰 영어를 집중적으로 공부하고 있으니 또 다른 모습을 보여드릴 수도 있을 것 같다”며 웃었다.
/해남=양준호기자 miguel@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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