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들어 2주 동안 대한변호사협회를 통하거나 개별적으로 세무사 등록 신청을 한 변호사 수가 무려 1,000여명에 달하는 것으로 파악됐다. “변호사의 세무사 업무 진출을 막는 법은 위헌”이라는 헌법재판소의 결정에도 국회가 기한 내에 세무사법 개정을 하지 않는 가운데 헌재 결정에 맞춰 2년 전부터 세무 업무를 준비했던 변호사들이 압박에 나선 것이다. 입법 미비로 세무대리 전문가 범위가 모호해지면서 당장 다음달 법인세 신고 때부터 ‘납세 혼란’이 일어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17일 대한변협에 따르면 이 단체가 이달 8일부터 지난 14일까지 일주일간 2004~2017년 변호사 자격을 취득한 전국 회원들을 대상으로 세무사등록증 대행 신청을 받은 결과 총 288명이 신청서를 냈다. 변협은 오는 21일 이들 신청서를 일괄적으로 국세청에 낼 예정이다. 법조계에서는 변협을 거치지 않고 올 들어 이날까지 개별적으로 세무사 등록을 신청한 변호사 수도 700여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했다.
변호사들이 이렇게 앞다퉈 세무사 등록 신청을 내는 것은 헌재가 원칙적으로 올해부터 변호사들에게 세무대리 업무 진출의 길을 열어줬는데도 국회가 법을 개정하지 않아 공백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헌재는 2018년 4월 세무사 자격을 보유한 변호사가 관련 업무를 볼 수 없게 막은 기존 세무사·법인세·소득세법에 대해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다. 세무사법이 변호사에 불리하게 개정된 2003년 말 이후부터 세무사 자격 자동부여 조항을 아예 폐지한 2018년 이전에 변호사가 된 사람들이 그 대상이다. 당시 헌재는 지난해 12월31일까지 국회가 세무사법 등을 개정하라고 주문했지만 지금껏 대체입법은 마련되지 않았고 올 1월1일부로 기존 법 조항의 효력만 소멸됐다. 헌재 결정 취지대로라면 변호사들은 세무사로 별도 ‘등록’하지 않아도 세무대리 업무를 수행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법적 근거가 없다 보니 일단 기존처럼 국세청에 등록 신청이라도 내는 고육책이자 압박책을 꺼냈다는 분석이다.
법조계에서는 2주간 1,000여명의 변호사가 세무사 등록 신청을 낸 것은 결코 적지 않은 숫자로 진단한다. 홍보 기간도 짧았던데다 국세청이 입법 미비를 이유로 업무 개시를 사실상 허용하지 않는 상태에서 이뤄진 수치이기 때문이다. 현시점에서는 변호사들이 세무사 등록을 신청하더라도 국세청이 실무에 필요한 홈택스 코드를 부여하지 않고 있다.
여기에 최종적인 대체입법을 기다렸다 신청하려는 대기수요까지 감안하면 세무 업무를 전문으로 하거나 병행하려는 실제 변호사 수는 이보다 훨씬 많을 것이란 분석이다. 법조계에서는 헌재 결정으로 새로 세무사 자격을 갖추게 된 변호사가 2만여명에 이를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지난해 10월 기준 변협 세무변호사회 가입자만 1,103명에 달하는데 이들 대부분이 세무사 등록 신청을 이미 냈거나 낼 예정인 것으로 알려졌다.
서울 서초동의 한 40대 변호사는 “사무실 내 변호사 6명 전원이 올 초 개별적으로 우편을 통해 세무사 등록 신청을 냈다”며 “주변에 한국세무사회 가입 문제, 국세청의 코드 부여 보류 조치로 인한 실제 업무 개시 불투명 문제 등으로 고민하는 변호사도 많은데 입법 문제만 해결되면 신청자는 더 늘어날 것”이라고 말했다.
단순 입법 공백 문제를 넘어 현재 법제사법위원회에 계류 중인 개정안도 논란의 대상이다. 지난해 국회는 김정우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발의한 개정안을 토대로 한 대안을 마련했는데 여기에는 여덟 가지의 세무 업무 중 회계장부 작성, 성실신고 확인 업무는 변호사에게 허용하지 않는 내용이 담겼다. 대다수의 변호사는 변호사에게 사실상 모든 세무대리 업무를 허용하는 정부안을 지지하고 있다.
서울 삼성동의 한 변호사는 “회계장부 작성과 성실신고 확인 업무는 세무대리 업무의 기본이기 때문에 이 두 가지를 막으면 나머지 업무도 사실상 전부 못하게 된다”며 “정치권에서 총선을 앞두고 세무사들 표를 의식한 결과”라고 꼬집었다.
변호사들이 세무사 업무 진출에 본격적으로 시동을 걸게 된 근본 원인은 2009년 법학전문대학원(로스쿨) 도입에 있다. 사법시험을 단계적으로 폐지하고 로스쿨을 도입하면서 법률 시장은 금세 포화상태를 맞았는데 정부가 전문직역 교통정리 방안은 마련하지 않은 탓이다. 현재 세무사회에 등록된 세무사는 1만3,000여명인데 최소 수천 명에서 최대 2만여명에 이르는 변호사들이 세무대리 업무에 뛰어들 경우 시장은 요동칠 수 있다.
아울러 각 변호사들의 세무대리 업무 가능 범위가 모호해짐에 따라 납세자들 입장에서도 당분간 혼란이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당장 다음달 법인세 신고와 5월 소득세 신고가 고비로 지목된다. 이찬희 변협 협회장은 “현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할 경우 위헌 소송을 또 낼 것”이라고 강조했다.
/윤경환기자 ykh22@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