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4조원에 달하는 거대 기금을 바탕으로 300곳이 넘는 국내 기업의 지분(5% 이상)을 보유한 국민연금의 경영개입 그림자가 재계를 덮칠 태세다. 기관투자가의 ‘5%룰 완화’를 계기로 국민연금이 ‘지배구조 개선’이라는 명분 아래 본격적인 주주행동에 나설 경우 기업들로서는 경영권 방어능력이 크게 훼손될 것이라는 우려가 높다.
21일 정부가 국무회의에서 의결한 ‘상법·자본시장법·국민연금법 시행령 개정안’이 시행될 경우 기업의 자율성과 경쟁력을 갉아먹는 독소규정이 될 것이라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시행령이 공포되면 국민연금이 △주주의 기본권리인 배당 관련 주주활동 △공적 연기금 등의 기업 지배구조 개선을 위한 정관변경 추진 △회사 임원의 위법행위에 대한 상법상 권한 행사 등을 위해 투자한 기업의 지분을 늘리거나 줄일 경우 지분 변동 발생 후 5일 이내 공시해야 했던 것이 지분변동이 발생한 달의 다음달 10일 전까지 약식보고로 바뀐다.
예를 들어 국민연금이 지분 8%를 보유하고 있는 A사에 대해 감사위원회 전문성 요건 강화를 요구하는 주주제안을 사전에 공개하고 감사위원 전문성 강화를 요구하는 주주제안을 계획 중인 상황에서 1월20일 지분을 1% 이상 매각할 경우 이전까지는 ‘경영권 영향 목적’으로 1월25일까지(5일 이내) 보고해야 했다. 하지만 이제는 ‘일반 투자 목적’으로 분류돼 2월10일까지 약식보고를 하면 된다. 약식보고는 일반(상세)보고와 달리 보유 목적과 지분 취득에 필요한 자금 등의 조성 내역을 명시하지 않는다. 정부는 이렇게 되면 추종 매매 등에 따른 공적 연기금의 수익률 하락을 막을 수 있다고 강조해왔지만 국민연금의 공시 부담이 줄어들게 돼 지분을 대량 보유하고 있는 기업에 대해 배당이나 지배구조 관련한 요구가 한층 거세질 가능성이 높다.
재계는 스튜어드십코드(기관투자가 의결권 행사 지침) 시행에도 불구하고 국민연금의 적극적 개입을 심리적으로 옥죄고 있던 5%룰이 완화됨으로써 공적연금을 활용한 정부의 ‘마구잡이식 기업 지배구조 개입’이 본격화할 것으로 우려한다. 시행령에 명시된 지배구조 개선이라는 요건 역시 지나치게 추상적이어서 국민연금의 의지에 따라 결정될 수 있다는 점도 기업에는 큰 리스크다. 상장사협의회 관계자는 “배당정책 활동은 일본·미국 모두 경영권에 영향을 주는 행위로 보고 있다”며 “보편적 지배구조 개선이라는 표현은 너무 광범위해 기업으로서는 그야말로 속수무책인 상황”이라고 우려했다.
학계에서도 이번 개정안에 무리가 될 만한 내용이 다수 포함됐다는 지적이 많다. 육태우 강원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자본시장법 시행령 개정안이 권리남용을 통해 경영권에 영향을 줄 수 있는 경우까지 보고의무를 완화해주는 것은 투자자 보호와 경영권 경쟁의 공정성 확보라는 5% 룰의 입법 목적에 맞지 않다”고 말했다. 이병태 KAIST 경영대학원 교수도 “또 하나의 한국형 규제로 인해 연금사회주의적 경영권 침해가 심화될 우려가 있다”며 “제도 이전에 연기금의 운용이 정권과 독립돼야 경제의 정치화를 피할 수 있는데 현재로서는 관치경제 강화로 경제에 악영향만 미칠 것”이라고 지적했다.
국민연금은 지난 15일 기준 국내 증시에 상장된 기업 중 313곳에 대해 5% 이상의 지분을 보유하고 있다. 시가총액 상위 30개 기업 가운데 삼성바이오로직스를 제외한 29개 기업, 50대 기업으로 넓혀도 세 곳을 제외하고는 5% 이상 지분을 갖고 있다. 시총 1위 삼성전자의 국민연금 지분율은 10.62%, SK하이닉스의 지분율은 10.24%다. 시총 3위 네이버의 경우 국민연금이 11.52%의 지분을 보유한 최대주주다.
재계는 국민연금법 개정안에 포함된 기금운용위원회 전문위원회 법제화에 대해서도 우려한다. 정부는 전문위원회로 투자정책전문위원회, 수탁자책임전문위원회, 위험관리·성과보상전문위원회 등 3개의 소위원회를 설치하도록 했으며 위원회별로 상근 전문위원 3명, 민간전문가 3명, 기금운용위원회 위원 3인으로 구성된 9명의 전문위원을 두도록 했다. 특히 이 중 수탁자책임전문위원회는 기금운용위원회 위원 대신 민간전문가 6명으로 구성된다. 상근 전문위원은 국민연금 가입자 단체별로 한 명씩 추천받아 위촉하기로 했다. 최준선 성균관대 법학전문대학원 명예교수는 “상근위원을 두는 것은 매사를 꼼꼼히 들여다보는 시어머니가 들어서는 것과 마찬가지여서 피투자기업의 경영 자율성이 침해되는 결과로 이어질 것”이라며 “가입자단체 추천이라고 하면 기업의 목소리가 거의 반영이 안 되고 묻혀버릴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양사록기자 sarok@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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