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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서단의 거목 何石 박원규 "붓과 스마트폰…극단의 조화가 균형이죠"

"원시·첨단 함께해야 삶 균형

디지털로만 내달려서는 안돼

서예는 정신성…박제화 걱정"

본지 창간60주년에 '60' 붓질

'포용·지조' 갖춘 언론 형상화





서예가 하석 박원규 선생이 서울경제 창간 60주년을 축하하며 쓴 숫자 60은 엄지손가락을 치켜든 으뜸을 형상화 하고 있다.


“한 손에 최첨단 스마트폰을 들고 있다면 다른 한쪽 손에는 가장 느리고 원시적인 필기도구인 붓을 쥐고 있어야 조화를 이룰 수 있습니다. 기술 발달을 등에 업고 디지털 방식으로만 내달려서는 안되죠. 아날로그와 디지털이 조화를 이뤄야 하듯, 첨단과 원시의 조화에서 우리 정신세계도 균형을 잡을 수 있는 것 아닐까요.”

묵향 가득한 서실이 자리 잡은 곳은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 미성상가 3층이다. 서예가 하석 박원규(73·사진)의 석곡실이다. 도심의 부촌 한가운데서 꼿꼿한 선비정신이라니. 하기야 압구정동의 이름이 조선 세조 때의 권세가 한명회가 지은 정자에서 유래한 것이니 어울린다고 할 수도 있겠다. 한국 서단의 거물 중 하나로 꼽히는 그는 흉내낼 수 없는 고유한 서체로 유명하고, 대중적으로는 임권택 감독의 영화 ‘춘향뎐’ ‘취화선’ ‘천년학’ 등의 제자(題字)로 친숙하다.

최근 서실에서 만난 그는 올해 창간 60주년을 맞은 서울경제에 축하의 의미로 숫자 ‘60’을 적어주었다. 그런데 붓을 들기도 전에 대뜸 반듯하고 매끈한 화선지를 구긴다. 범상치 않은 이 의식은 종이의 구김으로 예상치 못한 거친 효과를 내기 위한 하석 선생의 특기 중 하나다. 힘차게 수직으로 붓을 내리 꽂더니 이내 빠른 손놀림으로 동그라미 두 개를 그려 60을 완성했다. 숫자 6은 마치 엄지손가락을 치켜든 것 같은 모양으로, 국내 최초의 경제일간지 서울경제의 ‘으뜸’을 상징한다. 직선은 지조를, 살짝 겹친 두 개의 동그라미는 포용을 의미하는 형상이다.

“꾸러미 포(包)자에 얼굴 용(容)자를 쓴 ‘포용’은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까지도 끌어안아 그 얘기를 들어준다는 의미입니다. 다름을 인정하는 것이기에 이익을 위해 서로 합치는 야합과 구별되죠. 또한 객관성을 갖는 ‘지조’는 소위 꼰대스러운 고집과는 다르죠. 서울경제는 포용과 지조의 신문이라고 봅니다.”



선비의 고장 전주에서, 비옥한 땅을 가진 대지주의 아들로 태어난 박 서예가에게는 풍류 기질이 있었던 모양이다. 고등학교 때, 이종사촌 댁 현관 앞에 걸린 인지위덕(忍之爲德)이란 현판이 가슴에 박혔다. 이를 계기로 글자를 새기고 파는 전각을 시작했다. 중국과의 수교 이전이던 1982년이라 대만으로 가 이대목 선생을 사사했다. 박 서예가는 “현판을 떼어 붓으로 따라 그리기 시작한 게 내 글씨의 시작이었다”며 “먹 향기도 좋고 인주색까지 매력적으로 보였다”고 돌아봤다. 대만 유학은 “놀며 지난 유학(遊學)이었다”고 한다. 귀국 후 하필 서울 압구정에 서예실을 마련한 이유를 물으니 “메디치가(家)가 없었다면 어찌 르네상스가 태어났겠나, 예술과 문화는 부촌에서 난다”는 답이 돌아왔다.

그는 1979년 제1회 동아미술제 대상을 받으며 30대 초반에 서단의 스타가 됐다. 국전(國展)의 잡음을 떨치고자 야심차게 문 연 민전(民展)이었고, 서예 공모에 치수 제한도 없었다. 하석은 화선지 24장을 이어 폭 70㎝, 길이 135㎝의 대작을 포함한 4점을 출품했다. 그의 초대형 작품 때문에 2회 때부터 작품 치수는 ‘전시에 지장이 없을 정도의 무제한’이라는 조건이 붙었다.

이후 작품을 기록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여겨 1984년부터 2008년까지 매년 도록을 출간했다. 5년에 한 번씩은 대규모 전시를 여는 등 자신과의 약속에 엄격했다. 뚝심있게 세월을 보냈고, 다음 달에는 국립현대미술관이 개관 50년 만에 처음으로 기획한 서예전에 참여할 예정이다. 지난해 6월부터 서예진흥법이 시행되는 등 서예 활성화가 본격 궤도에 진입했지만 박 서예가의 눈에는 지나간 시간이 안타깝고 갈 길이 멀다.

“서단이 어렵고 박제화되어 가는 게 걱정입니다. 글씨 예술은 문자를 아는 게 우선인지라 태생 자체가 엘리트 문화입니다. ‘쓰는’ 기술적인 것은 10년만 갈고 닦으면 어느 정도 따라잡을 수 있지만 머리와 생각의 차이, 즉 정신성이 중요하죠. 늘 열려있는 마음으로, 책을 읽고 좋은 문구를 스스로 캐낼 수 있을 때 진정한 서예정신이 이뤄집니다.”
/조상인기자 ccsi@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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