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멘트 오브 트루스(Moment of Truth·진실의 순간)’는 원래 투우사가 칼을 들어 올려 소의 급소를 찔러 쓰러지게 하는 순간을 가리키던 말이지만, 마케팅에서는 고객이 브랜드의 인상을 평가하거나 구매를 결정하는 찰나의 순간(MOT)을 뜻합니다. 화가로 사는 지금은, 눈에 보이는 감동이 잔상으로 남아 그것을 그림으로 표현하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바로 그 순간이 저의 ‘진실의 순간’ 입니다.”
‘화백님’이 된 사장님은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져 있었다. 삼성전기 전무와 신한다이아몬드 사장을 역임한 전문 경영인 출신의 한국화가 이상표(61·사진) 화백 이 그랬다.
여의도 밤섬의 가을이나 샛강의 산책로, 광릉수목원을 걷다 마주치는 풍경에서 감동을 얻었고, 전국 각지의 비경과 고향산천의 아련함을 화폭에 담았다. 단양 사인암, 풍기 금선정, 속리산 문장대와 설악산 토왕성 폭포까지 세밀한 풍경화가 사계절을 잇는다. 처마 밑의 호박은 어린 시절의 향수를 자극했고, 해외여행에서의 반짝이는 추억은 이국적인 장면으로 그림이 됐다. 그는 수년간 꾸준히 그린 작품 중 50여 점을 엄선해 오는 3월 21일 서초 한전아트센터에서 개막하는 첫 개인전에서 선보일 계획이다.
미술을 전공한 적은 없지만 그는 무작정 그림이 좋았다. 7살부터 만화를 베끼는 그의 옆에서 그림을 따라 그리던 두 살 아래 남동생은 서양화를 전공해 미술가가 됐다. 정작 맏아들인 그는 부모님의 바람대로 기계공학을 전공했다.
“고등학교 때 미술 선생님(야송 이원좌·1939~2019)께 한국화 화법을 배운 게 그나마 갈증을 씻어줬어요. 만화를 그려서인지 선(線)이 주를 이루는 동양화가 수월했습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1983년 삼성전기에 입사한 후로 더욱 그림 그릴 기회가 없었지만 도록을 사 모으며 애틋함을 달랬죠.”
아주 지루한 회의 때 빈 종이 구석에 낙서하듯 그림 그리는 게 전부였던 그가 2010년 중국 텐진의 삼성전기 생산법인장으로 주재하면서 현지 예술인과 교류할 기회가 생겼다. 중국 최후의 문인화가 장다첸의 제자인 유자청 남계대 교수에게 동양화 기법을 배웠다. “처음에는 가르치다가 나중에는 ‘훈련이 덜 됐을 뿐이니 배우지 말고 같이 그리자’고 하던” 유 교수의 영향은 그림 속 호방한 필치에서 감지된다. 텐진미술협회가 펴내는 미술잡지 서화지가(書畵之家)에 그림이 수록되기도 했고, 사내 문화전에 작품을 내놓기도 했다.
사진을 찍은 듯 섬세한 필법은 오용길 전 이화여대 교수의 영향이다. 30년 가량 꾸준히 오 화백의 화보집을 모아 혼자 그림을 방(倣)했다. 그런 남편을 위해 아내는 2015년 예술의전당 아카데미에 개설된 오용길의 한국화 고급반 수업을 신청해 줬다.
“중국화는 의념산수(관념산수)로 부벽준,칠선묘 등 기법을 외워 이상향의 풍경을 그리는데, 오용길 선생에게는 사생에 기반해 실경 만을 고집한 그 특유의 화풍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싶은 풍경을 사진으로 찍어오되 아직 물들지 않은 단풍을 덧그리거나 어지럽게 자란 갈대를 솎아내는 조경은 화가만 누리는 권리죠. 2017년부터 매일 8시간씩 ‘미친듯이’ 그렸더니 어느새 눈에 보이는 건 다 그릴 수 있게 되더군요.”
양수겸장(兩手兼將)이 된 그는 훈련하듯 그림에 매달렸고 숱한 노력 후에 그림의 결점을 터득하기에 이르렀다.
“선 하나를 넣었을 때 어떤 효과가 있을지는 실패를 해봐야 합니다. 색도 칠할 때와 말랐을 때가 달라지기에 많이 그려봐야 하죠. 예측 경영이 가능한 이유는 수차례의 시행착오를 겪고 노하우를 터득했기 때문인 것과 같은 이유죠.”
서양 유화와 달리 한국화는 틀린 부분을 고칠 수가 없어 “잔인한 그림”이지만 “남겨놓을 것과 채울 것을 미리 가늠할 수 있어야”하기 때문에 더 매력적이다. 대관령 양떼목장에서 포착한 녹색 그림자, 비선대 흰 바위 위로 튕겨나는 빛 등의 표현에서 예측해 갈고 닦은 그 섬세함이 드러난다. 포르투갈 파티마성당과 오비도스 마을, 뉴욕의 호보캔공원 등을 담은 풍경에서는 숨 가쁜 직장생활에서 물러난 화가의 여유로운 시선을 엿볼 수 있다.
“업적과 실적, 손익을 다투는 경영인의 일상과 비교하면 화가는 스스로 그림 소재를 찾아내 내 손으로 표현하고 내 그림 그 자체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본연의 삶’에 더 가깝습니다. 그렇게 그림은 삶을 풍요롭게 합니다.”
/조상인기자 ccsi@sedaily.com·사진=성형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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