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일(한국시간) 혼다 클래식 우승으로 미국프로골프(PGA) 투어 사상 일곱 번째 한국인 챔피언이 된 임성재(22·CJ대한통운). 그는 아홉 살 때 국내 최연소 홀인원 기록을 세운 ‘골프신동’이자 ‘역전의 명수’다. 주니어 시절부터 대부분의 우승은 1라운드를 하위권에서 출발한 경기에서 나왔다. 2016년 일본 투어에서 프로 생활을 시작한 그는 2017~2018시즌 PGA 2부 투어 상금왕에 이어 2018~2019시즌 PGA 투어 신인왕까지 탄탄대로를 달렸다. 그랬던 임성재는 지난해 9월 쓰라린 기억을 떠안았다. 샌더슨 팜스 챔피언십 때 경쟁 선수가 마지막 홀에서 어려운 버디 퍼트를 넣는 바람에 연장에 끌려가 결국 패배를 맛봤다. 임성재는 “‘우승은 내 것이었는데…’라는 생각이 떠나지 않아 혼자 방에서 눈물을 흘렸다”고 털어놓았다.
그로부터 5개월이 지난 2일, 플로리다주 PGA 내셔널 챔피언스 코스에서 임성재는 비슷한 상황을 맞았다. 6언더파 274타의 선두로 먼저 경기를 마쳤지만 뒤 조의 스타플레이어 토미 플리트우드(잉글랜드)가 맹렬하게 추격해오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의 경기를 마치고 약 30분 뒤, 임성재는 연장을 준비하는 대신 로커룸에서 캐디와 뜨거운 포옹을 했다. 플리트우드가 마지막 홀에서 버디를 잡지 못하면서 임성재는 우승 상금 126만달러(약 15억2,000만원)의 주인공이 됐다. PGA 투어 50번째 대회에서 일군 첫 우승도 3라운드까지 3타 차 열세를 뒤집은 역전 우승이었다. 공동 63위→공동 9위→공동 5위로 성큼성큼 올라가 트로피에 입을 맞춘 임성재는 지난해 이 대회에서 2라운드까지 공동 선두를 달리다 3라운드에서 무너지며 공동 51위로 마쳤던 아쉬움을 훌훌 털었다. 혼다 클래식 48년 역사상 최연소 우승 기록도 그의 차지가 됐다.
최경주(8승)·양용은(2승)·배상문(2승)·노승열(1승)·김시우(2승)·강성훈(1승)의 뒤를 이어 ‘한국인 챔피언’ 계보에 이름을 올린 임성재는 시즌 성적 포인트인 페덱스컵 랭킹에서 10계단을 뛰어올라 2위에 자리했다. PGA 투어 12승의 저스틴 토머스(미국) 다음이고 18승의 로리 매킬로이(북아일랜드) 바로 위다. 시즌 상금도 약 322만달러로 토머스·매킬로이에 이은 3위다. PGA 투어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시상식 사진을 올리며 “임성재에게 우승은 시간문제일 뿐이었다”고 적었고 토머스는 “앞으로 더 많은 우승이 나올 것이라고 확신한다”는 덕담을 댓글로 남겼다. 토머스와는 지난해 말 미국-세계연합 대항전인 프레지던츠컵에서 상대팀으로 만났던 사이기도 하다.
관련기사
뉴욕타임스(NYT)는 “미국에 집도 구하지 않고 에어비앤비를 이용해 마라톤 스케줄을 소화하던 어린 선수가 혼다 클래식 최연소 우승 기록을 썼다”고 보도했다. 미국 골프닷컴은 “곧 우승해서 미국 내에서 좋은 선수로 인정받고 싶다”는 임성재의 과거 인터뷰를 소개하며 “우승과 존재감 과시라는 목표를 모두 이뤘다. 이력서가 더 풍부해졌다”고 평가했다. 임성재는 대선수인 필 미컬슨(미국)과 스페인의 영웅 욘 람이 속한 세계적인 매니지먼트사 라가디어그룹과 올 1월 계약하는 등 우승 전부터 PGA 투어를 이끌 차세대 스타로 인정받고 있었다. 골프TV에 따르면 임성재는 지난해부터 총 714개의 버디를 잡아 PGA 투어에서 압도적인 전체 1위를 달리고 있다.
이제 다음 목표는 메이저대회 제패와 도쿄올림픽 메달 획득이다. 한국 선수 중 세계랭킹(34위)이 가장 높았던 임성재는 랭킹을 25위까지 끌어올리며 올림픽 출전을 사실상 예약했다. 그는 최근 “타이트하지만 뿌리가 세지 않은 일본 코스의 잔디와 개인적으로 잘 맞는 것 같다”는 말로 메달 욕심을 감추지 않았다. PGA 투어 4대 메이저 일정은 다음달 마스터스로 시작된다. 마스터스 데뷔를 앞둔 임성재는 계속 대회 출전 일정을 이어가다가 마스터스 한 주 전에 대회장인 오거스타 내셔널로 넘어갈 예정이다.
한편 이번 우승으로 CJ그룹은 지난달 영화 ‘기생충’의 아카데미 석권으로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데 이어 스포츠마케팅으로도 ‘대박’을 터뜨렸다. CJ대한통운은 국내에서 여자 선수에 비해 상대적으로 관심이 적은 남자 골프선수들을 집중 후원해 뚜렷한 성과를 거두고 있다. 임성재뿐 아니라 2017 플레이어스 챔피언십 우승자 김시우, 지난해 AT&T 바이런 넬슨 챔피언 강성훈, 임성재와 함께 프레지던츠컵에 출전한 안병훈도 CJ대한통운 후원 선수다. CJ그룹 스포츠마케팅팀 관계자는 “우리 남자 선수들이 체격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세계 무대에서 통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는 생각에 2012년 무렵부터 남자 골프선수 후원을 시작했다”며 “단기적인 성과를 보고 뛰어든 것은 아니었는데 최근 몇 년 새 이렇게 좋은 결과가 이어져 고무적이다. 임성재 선수의 올해 말 재계약 문제를 포함해 앞으로도 묵묵히 지원을 이어갈 것”이라고 말했다.
/양준호기자 miguel@sedaily.com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