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유사들이 국제유가 폭락에도 불구하고 가공제품인 휘발유 가격이 원유보다 더 싸지는 최악의 상황을 맞이하고 있다. 신종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인해 전 세계 석유제품 수요가 가파르게 감소하며 정제이후 제품가격이 원재료 가격보다 낮게 거래되는 상황이다. 여기에 중국은 코로나 19 이후 낮췄던 정유공장 가동률을 높이고 있어 국내 정유사들의 비상경영 행보가 빨라지고 있다.
24일 정유업계에 따르면 지난주 석유제품 시장에서 휘발유는 원재료인 두바이유보다 낮은 가격에 팔렸다. 최근 국제유가 급락으로 지난주 두바이유 가격이 배럴당 평균 29.01달러에 머물렀음에도 가공제품인 휘발유 가격은 그보다 낮은 배럴당 27.98달러를 기록했다. 코로나19가 확산하기 전인 1월 넷째 주 두바이유보다 배럴당 약 10달러 높았던 국제 휘발유 가격은 지난주까지 40달러 이상 하락했다. 전 세계에서 수요가 급감하며 현재는 휘발유 제품을 팔수록 손해가 나는 상황인 셈이다.
이는 정유사의 수익 지표인 정제마진에서도 드러난다. 정제마진은 지난해 9월 10.1달러로 정점을 찍었으나 이후 계속 하락해 국내 정유사 손익분기점(BEP)인 5달러를 넘지 못하고 있다. 지난주 정제마진은 배럴당 -1.9달러로 약 3개월 만에 다시 마이너스를 기록했다. 지난해 11~12월 -0.2달러에서 -0.9달러를 오가던 것보다도 악화한 수치다. 김정현 교보증권 연구원은 “자택대피령 등 강도 높은 코로나 억지 대책을 실시 중인 미국과 국가 간 여행금지 조치에 합의한 유럽연합(EU)에서 도로주행용 연료 소비 감소가 두드러질 것”이라며 “이미 글로벌 주요 도시 전역에서는 교통 혼잡도가 현저히 감소했다”고 분석했다.
최근 급등한 환율 역시 국내 정유사에는 악재로 작용하고 있다. 정유사들은 원유를 달러로 구매하기 때문에 환율이 오르는 만큼 비용이 커지는 구조다. 에쓰오일의 지난해 감사보고서에 따르면 원·달러 환율이 10% 상승할 경우 세후이익은 약 2,166억원 감소한다. SK에너지의 지난해 3·4분기 누적 세전 순이익 역시 환율이 5% 상승할 때 658억원 감소한다.
이는 최근 급락한 국제유가와 함께 국내 정유사들의 단기 실적을 악화하는 요인이다. 에쓰오일과 SK이노베이션(096770)은 2월 이후에만 약 3,283억원의 재고손실을 볼 것으로 추정된다. 정유업계의 한 관계자는 “코로나19 탓에 전 제품의 수요가 절벽인 상황에서 유가 급락에 환율 급등까지 삼각 파도를 넘고 있는 심정”이라고 말했다.
이런 상황에서 중국 내 정유공장은 가동률을 높이고 있어 제품 가격 하락이 더욱 가팔라질 것으로 예상된다. 외신 등에 따르면 컨설팅업체 JLC는 중국 산둥 지역 정유사 가동률이 지난주 49%로 조사됐다고 밝혔다. 5년 만에 가장 낮은 수준을 기록한 2월 말(37%) 대비 10%포인트 이상 상승한 수치다. 이번 주에는 코로나19 사태가 완화됨에 따라 가동률이 57% 안팎까지 뛰어오를 것으로 전망된다.
유가에 환율까지 충격이 더해지며 현대오일뱅크는 비상경영에 돌입했다. 현대오일뱅크는 이날 강달호 사장을 비롯한 전 임원의 급여를 20% 반납하게 하고 경비예산을 최대 70% 삭감하는 등 불필요한 비용을 전면 축소하기로 했다. 현대오일뱅크 관계자는 “강 사장이 지난해 말부터 매주 비용 절감과 수익개선 방안을 강구하는 비상회의를 주재하고 있다”며 “정제마진이 대폭 감소하고 재고 손실까지 누적되면서 시름이 깊은 상황”이라고 전했다.
/박효정기자 jpark@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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