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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절차에 저항하라

김홍일 디캠프 센터장

김홍일 디캠프 센터장




90년대 초반 은행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당시 선배들은 “절차가 너를 보호한다. 규정대로만 집행하라”고 조언했다. 기업이 대출 신청을 하면 적정성이나 경제적 효과를 따지기보다 절차를 보수적으로 해석해 추후 감사에 걸릴 소지가 없도록 하란 얘기였다.

절차는 업무 진행과정의 실수를 줄이고 결과의 품질을 균일하게 맞추며 조직 효율성을 높이는 긍정적인 효과가 있다. 오랜 실험 또는 경험이 모여 형성된 것으로 효율적인 의사소통과 집행을 위한 집단지성의 결과물이기도 하다.

그러나 환경이 변화하면 절차는 생명력을 상실하고, 조직과 사회의 변화를 어렵게 하는 장애물로 전락한다. 유발 하라리의 최근 기고문을 보면 이스라엘은 1948 독립전쟁 당시 국가 비상 상황을 선포하면서 다양한 임시 조치를 취했다. 너무 세세해서 디저트인 푸딩 조리 방법에 대한 특별 규정까지 있었다고 한다. 규정들은 그 자체로 거대한 산이 돼 변화의 걸림돌이 됐다. 다행히 지금은 그 규정이 폐지됐다.

이런 사태를 막으려면 절차는 그 자체로 지켜야 하는 목표가 아니라 행동의 방향을 제시하는 역할에 그쳐야 한다. 아마존의 제프 베이조스 최고경영자(CEO)는 2017년 주주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절차에 저항하라’는 최우선 원칙을 천명한 바 있다. ‘프로세스를 잘 지켰는지만 중요하게 생각하는 대기업들이 많다. 경험 많은 리더는 늘 프로세스를 들여다보고 개선 여지가 있는지 확인한다.’



한국이 선진국으로 급성장한 것은 규제에 얽매이지 않는 창의적인 발상 덕이었다. 한참 발전할 때는 ‘되는 것도 없지만 안되는 것도 없는 사회’였다. 막 형성되는 사회였으니 절차에 공백이 있는 분야가 많았다. 지금 보면 황당하고 상상하기 어려운 시도가 가능했다. 이 과정에서 각종 문제가 해결됐고 경험이 모여 다양한 사회적 합의가 도출됐다.

현재 한국 경제의 최고 화두 중 하나인 스타트업들은 생존을 위해 최소한의 절차로 움직이고 있다. 그 작은 기업들에 내부적으로 복잡한 절차가 있을 수 없다. 이들을 양성해야 하는 한국 사회는 시간이 흘러 수많은 절차와 규제에 얽매여 있다. 정부가 규제 샌드박스 등을 운영하고 있기는 하다. 예외적으로 규제를 적용하지 않겠다는 샌드박스라는 용어 자체가 기득권들의 한계를 부각해 보여준다. 오늘날의 경제 환경을 반영하지 못하는 절차를 혁신하지 않으면서 일시적 예외만 허용하기 때문이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가 심각해지자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의료계의 레드테이프(관료주의) 문제를 제기했다. 이렇게 큰 위기에선 절차만 고집하면 안된다. 기존 절차가 주는 익숙함에서 발을 떼고, 좋은 결과를 향한 가장 빠른 길을 선택하는 용기가 필요하다. 위기를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절차 혁신의 합의 기회로 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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