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 속에서 더 잘 보이는 것들이 있다. 내리치는 벼락의 번쩍임 같은 것이 그렇다. 빛이 아님에도 어둠 속에서 빛나는 것들이 있다. 검은 밤바다를 달래는 파도는 바위에 부딪혀 부서지는 순간 하얀 포말로 빛나고 이내 사라진다. 겨울이 끝났음을 선언하는 매화나 봄의 여신 같은 흐드러진 벚꽃은 낮에도 눈부시지만 밤에 보면 또 다른 찬란함을 뽐낸다. 이 ‘어둡고 빛나는 순간’은 어쩌면 찰나라 더 간절할지도 모른다.
서양화가 정직성(43)은 이 순간을 붙들고 싶었다. 깊이 있는 검은색인 옻칠 위에 빛나는 자개를 하나하나 붙이고 끊어내는 나전칠기 기법으로 풍경을 아로새겼다.
그가 나전칠기 옻칠 작업을 시작한 계기는 2년 여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제주 가파도의 한 레지던시에 머무르며 신작을 구상하던 작가는 제주 자체라고도 할 법한 현무암, 제주 밤바다의 ‘깊은 검은색’을 표현하기 위해 고민했다. 도시, 연립주택, 공사장, 기계, 식물, 바람 등 추상화 한 풍경을 표현주의적으로 그려온 정직성은 당시 일명 ‘밤 매화’ 작업에 한창이었다.
매화 그림을 펼쳐 놓은 그의 작업실로 나전칠기 명인 유철현(67) 씨가 찾아왔다. 아파트 생활이 보편화 되면서 길거리에 버려지는 중고 자개농을 수집하다 알게 된 작가의 자문인 같은 분이다. 자개농과 매화를 번갈아 보며 ‘자개로 작업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스쳤다. 유씨가 가족회사인 아라지안공방을 통해 재료공급과 기술협력을 돕겠다고 나섰다.
서울 용산구 회나무로 아트딜라이트 갤러리에 선보인 20여 점의 작품들은 그렇게 탄생했다. 흰색을 내는 진주패, 청록색의 뉴질랜드패, 회색빛 흑진주, 오색의 색패 등 자개가 화가의 물감이 됐다. 자개 표면을 톡톡 쳐 미세한 갈라짐으로 무늬를 내는 끊음질은 생각대로 손쓰기가 쉽지 않고 의도대로 문양이 만들어지지도 않아 몇 달 간 애를 먹었다. 유씨가 적극적으로 기법을 전수했고, 작가의 타고난 손재주와 질긴 근성도 한몫했다. 이제는 끊음질이 ‘붓질’처럼 익숙해졌다.
작가는 “구체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지만 추상성을 띠는 것, 추상적이지만 현실 세계와의 연결고리를 놓치지 않는 것, 고통스런 삶을 부정하지 않고 받아들이면서도 낙천성을 지닌 것, 어눌하지만 손노동의 정성스러움이 보이는 것, 테크닉을 과시하지 않고 절제할 줄 아는 것, 몸 혹은 손을 움직이는 노동에 스스럼이 없는 것”을 보여주고자 했다고 말한다.
미술이론가 박혜성씨는 평론글에서 “재료도 재료지만 과감한 붓질 대신 화면을 가득 채운 섬세한 ‘공력(工力)’과 재료의 독특한 ‘물질성’을 통해 그녀의 작품은 지금껏 당연하게 머물던 ‘회화’의 경계를 확장한다”고 했다. 정직성은 2012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상인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을 받고 ‘김종영미술관 오늘의 작가’에 선정되는 등 화단의 주목을 받는 작가다.
전시가 한창인 아트딜라이트는 2018년 6월에 개관한 젊은 화랑이다. 프랑스 디자이너 까스텔바작의 국내 독점 매니지먼트사이기도 한 곳으로 ‘맨드라미’의 김지원과 ‘붉은 산수’의 이세현 전시로 개관전을 열었고 사진작가 민병헌 등 중량급 작가와 젊은 작가를 고루 소개해 왔다. 전시는 30일까지.
/글·사진=조상인기자 ccsi@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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