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치고는 옷에 대한 관심이 많기는 했지만 이게 사업을 하게 된 직접적인 이유는 아니에요. 김봉진 배달의민족 대표가 배달에 관심이 있어 배달 애플리케이션을 개발한 건 아니거든요. 흩어져 있던 전단지를 한데 모으면 편리하겠다 싶어 만든 게 배달의민족이죠. ‘지그재그’도 마찬가지입니다. 온라인 여성복 시장에서 일하는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다 수많은 동대문쇼핑몰을 한데 모으면 어떨까, 흩어져 있는 매장들을 한눈에 보면서 입고 싶은 옷을 코디하면 어떨까, 결제도 한 번에 하는 방법은 없을까 고민하다 개발한 게 바로 여성복 쇼핑몰 지그재그입니다.”
2일 서울 강남 테헤란로에 위치한 패션 테크 기업 크로키닷컴 본사에서 만난 서정훈(43·사진) 대표는 “지난 2015년 지그재그를 구상할 당시 의식주 플랫폼 서비스 중에 ‘식’은 배달의민족, ‘주’는 다방·직방 등 부동산 앱이 커진 상태였지만 패션은 떠오르는 무언가가 없었다”며 지그재그를 시작한 배경을 설명했다. 한국 패션 산업의 품질경쟁력에 비해 모바일서비스 경쟁력이 약하다고 판단해 ‘의류 시장에 정보기술(IT)을 접목해 혁신하면 승산이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는 것이다. 서 대표는 “앱이 포화된 모바일 생태계에서 살아남으려면 ‘초미세 틈새시장’을 공략해야 한다”며 “이제는 1030 여성 대부분이 이용하는 앱이 바로 지그재그”라고 말했다.
스포츠 커뮤니티·영어 단어장 앱 등
야심차게 내놨었지만 반응은 시큰둥
벼랑 끝 심정으로 의식주 빈곳 노크
지그재그는 서 대표가 2012년 이전 직장에서 함께 일하던 엔지니어를 설득해 공동 창업한 플랫폼 업체인 크로키닷컴이 내놓은 대표 서비스다. 2015년 여성복 쇼핑몰을 플랫폼에 한데 모아 론칭했다. 지그재그는 현재 1020대 여성들이 가장 많이 쓰는 패션 앱이 됐는데 여러 쇼핑몰에서 구매하고 결제하는 번거로움을 해소한 것이 성장의 원동력이다. 누적 다운로드 수는 2,000만건에 달할 정도다. 월 이용자 수도 270만명으로 한섬 등 유명 브랜드를 널찍이 제쳤다.
급속 성장한 지그재그 덕에 지난해 크로키닷컴의 매출은 293억원, 영업이익은 89억원을 달성했다. 연간 총 거래액도 6,000억원, 입점한 쇼핑몰만 3,700여곳에 이를 만큼 여성 온라인쇼핑 플랫폼으로서는 독보적인 위치에 올라섰다. 최근에는 온라인쇼핑몰 플랫폼으로는 처음으로 배우 한예슬을 내세워 방송광고까지 선보였다. 젊은 세대를 넘어 다양한 연령대로 이용자를 넓히겠다는 전략이다.
이제는 ‘넥스트 유니콘(기업가치가 1조원에 달하는 비상장 스타트업)’이 될 것이라는 기대를 받고 있는 크로키닷컴이지만 처음부터 승승장구했던 것은 아니다. 초기에 선보인 서비스들은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 못했다. 실제 첫 사업 아이템이었던 스포츠 커뮤니티 앱인 ‘팀에이블’의 경우 1년간 개발 끝에 글로벌 시장에 선보였지만 반응은 시큰둥했다고 한다. 서 대표는 “사업 초기에 무조건 글로벌 시장에 나가야 하고 남들이 하지 않는 분야의 앱을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서비스를 만들었고 결과적으로 실패했다”며 “국내 시장부터 견고하게 잡고 세계 시장으로 나가야 한다는 교훈을 얻었다”고 회고했다. 그는 “한 가지 다행스러웠던 점은 앱의 완성도가 괜찮다는 평가를 받아 스포츠팀을 위한 앱을 찾고 있던 나이키에 팀에이블을 넘겼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는 실패에도 불구하고 그가 다시 일어설 수 있었던 이유기도 하다. 서 대표의 이력을 따라가다 보면 젊은 사업가답게 인수합병(M&A)에 개방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2013년에는 영어 단어장 앱인 ‘쿠키단어장(이후에 ‘비스킷’으로 서비스명 변경)’을 만들어 출시했는데, 이듬해인 2014년 말 옐로모바일 계열사인 말랑스튜디오에 팔았다. 에버노트에서 주최하는 경진대회를 비롯해 글로벌 K스타트업대회에서도 수상하는 등 제품성을 인정받았지만 교육 분야에서 크게 키울 자신이 없었다고 한다. 이런 경험이 사업을 보는 눈과 비즈니스 감각을 키우는 데 도움을 줬다고 한다. 서 대표는 “사실 지그재그를 기획했던 당시도 ‘국내 시장의 니즈가 있는 의식주 관련 서비스 중 빈 곳을 공략해보고 안 되면 정리하자’는 마음이었다”고 말했다.
‘원조 패스트패션’ 동대문서 새 기회
‘지그재그’로 여성 쇼핑앱 강자 도약
의류업계 첫 유니콘 기업 가능성도
“다각화 대신 패션 주력…日도 진출”
패스트패션(최신 트렌드를 즉각 반영해 빠르게 제작하고 빠르게 유통시키는 의류)하면 외국 브랜드인 자라·H&M 등을 떠올리지만 그보다 앞서 한국에는 ‘동대문 패션’이 있었다. 동대문이 디자인부터 생산·판매까지 한 곳에서 이뤄지는 ‘원조 패스트패션’인 셈. 최근 미국에서는 미셸 오바마가 즐겨 입었던 브랜드인 제이크루가 파산했고 국내 고가 백화점 브랜드도 고전을 면하지 못하고 있지만 ‘K패스트패션’으로 불리는 동대문 옷들은 지그재그와 같은 플랫폼을 통해 잘 팔리고 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인해 재택근무가 확산되면서 고가의 옷보다 언택트(비대면) 소비가 인기를 끈 것이 행운으로 작용했다. 서 대표는 앞으로 동대문 패션이 더욱 성장할 수 있도록 IT 기술을 고도화할 계획이다. 그는 “한국에만 있는 유니크한 마켓이 바로 동대문 패션 시장이자 지그재그의 기반”이라며 “동대문 의류 업계 종사자들이 고유 영역인 옷에 더욱 집중할 수 있도록 우리가 전통시장에 제대로 IT를 접목해야 한다는 사명감이 있다”고 강조했다.
서 대표는 특히 “동대문 새벽시장이 매력적”이라고 말했다. 젊고 실력 있는 디자이너들이 사계절 변화에 맞춰 자신의 아이디어를 가장 빠르게 발전시키는 동대문 새벽시장에서 에너지를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속도와 다양성이 생명인 디지털 시대에 꼭 맞는 시장이 동대문”이라며 “사업이 발전하면 유통·마케팅 등 부수적인 일까지 해야 하는데 이런 부수적인 일은 지그재그와 같은 IT 플랫폼에 넘기고 이런 의류 종사자들이 잘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하도록 돕는 게 자신의 역할”이라고 거듭 말했다.
시장에서는 크로키닷컴이 한국 의류 업계 최초의 유니콘기업이 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고 있다. 현재 성장 속도도 빠르지만 코로나19로 인한 패션 산업 패러다임의 전환도 긍정적이라는 분석이다. 하지만 서 대표는 자세를 낮췄다. 그는 “빠르게 성장하는 것은 맞지만 수많은 성공과 실패를 경험하면서 담담해지는 법을 배웠다”고 했다.
그렇다고 유니콘에 대한 열망을 숨기지는 않았다. 서 대표는 “지그재그가 미래 소비 권력인 10~20대의 열렬한 지지를 바탕으로 30~40대 여성에게도 호평받고 있다”며 “옷을 살 때 가장 먼저 떠올리는 e커머스 플랫폼이 된다면 그때는 유니콘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스타트업이 100억원가량의 영업이익을 내면 다음 단계는 해외 진출과 사업 다각화다. 서 대표는 해외 진출을 준비하고 있지만 사업 다각화에 대해서는 선을 그었다. 2018년 패션 브랜드 스타일난다가 로레알에 6,000억원에 매각될 당시 기업가치를 높게 평가받은 것은 스타일난다의 주력인 옷이 아닌 서브 사업이었던 화장품 브랜드 3CE 덕이었다. 화장품 회사인 로레알이 패션회사로 더 유명한 스타일난다를 사들인 이유다. 서 대표는 “스타일난다의 매각 스토리는 어느 정도 알고 있다”며 “그러나 아직은 패션에 더욱 주력할 때지 다른 사업 확장은 생각하고 있지 않다”고 말했다.
일본 진출도 준비하고 있다. 서 대표는 “일본은 유럽과 마찬가지로 신진 브랜드나 새로운 서비스가 안착하기에 매우 어렵다”며 “그럼에도 높은 고객 충성도는 매력적인 요소”라고 말했다. 그는 “심혈을 기울여 소비자 니즈를 분석하고 일본인들에게 편리한 서비스를 연구 중”이라고 소개했다. /연승기자 yeonvic@sedaily.com 사진=성형주기자
◇He is △1977년 서울 △2004년 아주대 미디어학과 석사 △2004~2008년 디지탈아리아(현 지트리비앤티) 개발팀장 △2008~2012년 라일락(디지탈아리아의 자회사) 대표 △2012년 크로키닷컴 창업 △2015년 여성복 패션 플랫폼 ‘지그재그’ 론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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