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여 읍내에서 부여대교를 건너 40번 지방국도를 따라 차로 20여 분을 달리면 반교리다. 마을 입구에는 작은 개천 위로 반교교라는 다리가 놓여 있는데, 이 다리를 건너야만 마을로 들어갈 수 있다. 다리 건너에는 잔디가 넓게 깔린 익숙한 모습의 건물이 나오는데, 1999년 폐교한 반교국민학교를 개조해 만든 유스호스텔이다. 유스호스텔 담벼락을 따라 올라가는 길이 반교리 돌담길의 시작이다. 돌담길은 뚜렷한 경계 없이 시작돼 마을 안쪽으로 이어진다. 돌담길을 따라가다 보면 미로처럼 동네 곳곳으로 끝없이 연결돼 같은 곳을 몇 바퀴나 돌게 된다. 유일하게 담이 끊어지는 부분은 어김없이 집으로 들어가는 입구다. 집마다 대문이 없는 게 특징이다. 마을이 아기자기하고 돌담 옆으로 다양한 꽃들이 심어져 있어 주말이면 사진을 찍으러 멀리서도 찾아온다고 한다.
이곳의 돌담은 제주 돌담과는 또 다르다. 제주 돌담은 돌과 돌 사이에 바람구멍이 나 있지만 이곳은 작은 돌과 흙으로 구멍이 메워져 있다. 조선 시대부터 쌓기 시작했다는 돌담은 산 너머 서해에서 불어오는 바닷바람이 집으로 들이치는 것을 막기 위해 쌓았다는 설과 집을 지으려고 땅을 파면 돌이 많이 나와 담으로 쌓았다는 설이 있는데 둘 다 틀린 이야기는 아닌 것 같다. 마을의 한 주민은 “예전에는 남의 집을 통과해야만 마을을 돌아다닐 수 있을 만큼 길이 좁아 내 집처럼 이웃집을 드나들었다”며 “자연스럽게 동네에 대문을 설치하는 집도 없었다”고 말했다.
동네가 유명해지기 시작한 것은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 때문이다. 유 전 청장이 재임하던 2006년 문화재청은 반교마을 돌담길을 등록문화재(제280호)로 지정했다. 그는 같은 해 숙원이던 ‘5도2촌(도시에서 5일, 촌에서 2일 거주)’을 실현하기 위해 반교리에 ‘휴휴당(休休堂)’을 짓고 시골살이를 시작했다. 이 동네 제일 안쪽 집이 유 전 청장의 집이다. 휴휴당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제6권)’에도 언급된다. ‘우리 집이 일반 한옥과 다른 점은 나무기둥을 쓰지 않고 돌담으로 뼈대를 올린 것이다. 그것은 이 동네 자연조건에 맞춘 것이었다. (중략) 반교리는 땅 밑이 모두 돌이다. 그래서 이 동네 집집이 다 돌담인 것이다. 집터를 고르면서 나온 돌로 집을 지었고 돌담을 둘렀다. 이것이 지금 나의 반교리 시골집이다.’
/글·사진(부여)=최성욱기자 secret@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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