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삼성중공업은 올해 ‘선체 무(無)도면 프로젝트’를 선언했다. 2차원(2D)으로 이뤄졌던 선체 도면 작업을 3차원(3D) 모델링과 사전 시뮬레이션으로 완전히 대체하는 내용이다. 조선소 현장에서 태블릿 PC와 3D 뷰어로 선박을 가상 조립하고, 아이디어를 실시간으로 가상 선박에 적용할 수 있어 비용과 시간을 혁신적으로 절감하게 됐다. 이를 가능하게 한 것은 개발사 ‘유니티’의 게임엔진 기술이다. 게임엔진은 그래픽을 출력하는 렌더링 엔진, 물리 엔진, 사운드, 애니메이션 등 게임 개발의 기반이 되는 모든 기술의 집합체를 말한다.
#2. 핀란드의 한 시각화 스튜디오는 수도인 헬싱키 전체를 에픽게임즈의 ‘언리얼’ 엔진으로 제작했다. 이 가상 도시는 실제로 핀란드 당국이 여러 국제행사에서 헬싱키를 홍보하는 데 쓰이고 있다. 부동산 업계는 고객에게 가상현실(VR)을 통해 헬싱키 내 매물을 보여줄 수 있고, 교통·환경 영향평가에 활용 가능해 도시계획 측면에서도 획기적인 가능성이 열렸다.
게임이 엔터테인먼트를 넘어 전 산업 분야로 연결되면서 ‘포스트 코로나’ 시대 핵심기술의 원천이자 시험대로 떠오르고 있다. 특히 전문가들은 가상으로 현실을 구현해 실시간 시뮬레이션을 가능하게 하는 ‘디지털 트윈(Digital Twin)’에서 게임이 점점 더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될 것이라고 전망한다.
지난 13일 한국게임학회(학회장 위정현)는 디지털 트윈을 주제로 춘계 학술발표대회를 개최했다. 이날 강연에 나선 전문가들은 게임 제작의 기반 기술을 활용해 이전에는 상상하지 못했던 많은 일들이 가능해질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특히 자율주행 같은 신산업 분야에 가상 현실을 접목하는 시도가 활발해지면서 디지털 트윈이 4차 산업혁명을 견인할 것으로 내다봤다. 임태범 전자부품연구원 센터장은 “디지털 트윈은 가상 세계와 현실 세계가 서로 실시간으로 소통하면서 발전해나갈 수 있는 구조”라며 “원하는 목표를 얻을 때까지 무한으로 시뮬레이션을 돌려 현실의 제품과 서비스에 적용 가능하다는 게 핵심”이라고 설명했다.
게임엔진이 자율주행·조선업 같은 산업 분야에 적용되고 있는 게 디지털 트윈의 대표 사례다. 블리자드사의 ‘하스스톤’, VR 게임 ‘릭 앤 모티’ 등을 제작하는 데 사용된 유니티 엔진은 게임을 넘어 교육·건설·자동차·e커머스 등 각종 산업에 활용되고 있다. 현대·기아차, 아우디, 폭스바겐, BMW 등 회사는 신차를 가상 모델로 구현해 광고에 쓰기도 하고 증강현실(AR)로 차량 조작법을 안내하기도 한다. 바이두는 게임엔진으로 실시간 자율주행 시뮬레이션을 개발해 자율주행차 테스트에 활용하고 있다. 영화나 애니메이션 제작, 네이버 자회사 스노우의 가상 아바타 ‘제페토’를 만드는 데도 유니티 엔진이 쓰인다.
기존에 3D 모델은 여러 프로그램으로 한 땀 한 땀 구현해야 했다. 하지만 게임을 제작하기 위한 그래픽·물리·사운드 등 기능의 ‘종합선물세트’인 게임엔진이 도입되면서 이 같은 과정은 획기적으로 간편해졌다. 안무정 LG CNS 책임은 “가상공간의 물체에 색상도 입히고, 바람도 불게 할 수 있는 여러 기능을 갖춘 것이 게임엔진”이라며 “인간의 감수성이 기술과 결합해 창의력을 바탕으로 새로운 경쟁력이 창출되는 현상이 더욱 심화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디지털 트윈 시장은 사물인터넷(IoT), 자율주행 등 4차 산업혁명이 촉발한 신산업과 더불어 폭발적으로 성장할 것으로 전망된다. 10대 전략기술 트렌드 중 하나로 디지털 트윈을 지속적으로 언급해온 미국 정보기술(IT) 컨설팅 기업 가트너는 “수년 내로 수백만개의 사물이 디지털 트윈으로 표현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시장조사기관 마켓리서치퓨처는 디지털 트윈 시장 규모가 오는 2023년까지 연평균 37%씩 성장해 150억달러(약 18조원)에 이를 것으로 예측한다.
따라서 한국도 국가 차원에서 디지털 트윈 전략 마련에 나서야 한다는 지적이 나왔다. 영국의 ‘디지털영국구축센터(CDBB)’는 지난해 디지털 트윈 개발의 국가 기준이 되는 ‘제미니 원칙(Gemini Principles)’을 발표했다. △명확한 목적 △신뢰성 담보 △효율적인 구동 등 국가적 디지털 트윈 구축의 전제가 되는 아홉 가지 대원칙을 마련해 제시하고 있다. 미국에서 출범한 ‘디지털 트윈 컨소시엄(DTC)’에는 마이크로소프트·델 등을 주축으로 각종 연구기관과 기업이 참여해 기술공유를 위해 상호 협력하고 있다. 임 센터장은 “소비자·지자체·기업 등이 모두 디지털 트윈에 플레이어로 참여해야 새로운 사업 기회를 만들 수 있다”고 말했다. /오지현기자 ohjh@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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