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금시장 경색에 대비해 미리 현금을 조달해두려는 기업들이 늘고 있다. 정부의 자금안정 대책 뒤 회사채 시장이 다소 안정화되자 한 달 보름 새 운영자금으로만 3조6,000억원을 웃도는 현금을 확보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2차 팬데믹 등을 대비해 현금을 확보하고 있는 것이다.
17일 투자은행(IB) 업계에 따르면 현대오일뱅크는 다음달 1,500억원 규모의 회사채를 발행해 자금을 조달한다. 올해만 세 번째다. 지난 2월 공모사채로 5,000억원, 3월 영구채(신종자본증권)로 2,800억원을 끌어모았다. 상반기에만 회사채 시장에서 1조원에 육박하는 자금을 확보한 셈이다.
SK종합화학도 최대 3,000억원 규모의 공모채 발행에 착수했다. 오는 22일 수요예측을 진행한다. 하반기 만기가 돌아오는 회사채와 기업어음(CP) 상환을 위해 선제적으로 자금을 확보하려는 목적이다. 1년 만에 회사채 시장을 찾은 OCI(010060)는 9월 만기 예정인 회사채 상환자금을 미리 조달한다. 신세계센트럴시티와 NS쇼핑·SK머티리얼즈는 올해 상환해야 할 사채가 없지만 운영자금을 미리 쌓아둘 목적으로 회사채 발행을 결정했다.
이런 움직임은 채무상환 등 꼭 필요한 자금만 조달하던 4월과 대조적이다. 기업들이 지난달부터 이달 중순까지 회사채 시장에서 운영자금으로 조달한 현금은 3조6,000억원을 웃돈다. 3~4월 두 달간 끌어모은 1조9,500억원보다 85% 늘었다. 롯데하이마트(071840)와 SK브로드밴드·현대케피코·하이트진로(000080)·태광실업·보령제약(003850)·SK가스(018670) 등이 운영자금을 조달할 목적으로 회사채 시장을 찾았다. 사전청약에서 발행계획보다 매수 주문이 몰리면 증액 발행하는 경우도 늘어났다. 모두 여유자금을 확보하기 위한 포석이다.
금융기관 차입도 늘었다. 호텔신라(008770)는 16일 코로나19 장기화에 대비한 유동성 확보 목적으로 500억원을 빌렸다. 제주항공(089590)도 500억원의 운영자금을 차입했으며 나인테크(30억원), TJ미디어(032540)(100억원), KC코트렐(100억원), 국동(100억원), 한탑(95억원) 등도 단기로 자금을 빌렸다. IB 업계의 한 관계자는 “채안펀드와 산업은행 등 정부 차원의 유동성 공급 효과로 발행시장이 정상 수준을 찾아가고 있다”며 “기업들이 시장에서 돈을 구할 수 있을 때 비축해두려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3~4월 유례없는 자금시장 경색을 겪으면서 많은 기업이 유동성 위기에 대한 공포를 체감했다. 이에 설비투자나 인수합병(M&A) 등 대규모 자금이 유출되는 상황을 줄이고 현금을 확보해 경기하강에 대비할 수 있는 ‘방파제’를 쌓고 있다는 얘기다.
한 대형 증권사의 기업금융본부장은 “코로나19와 북한 리스크까지 겹치면서 경기침체와 내수불황 등 불확실성이 커지는 분위기”라며 “장기전에 대비해 유동성을 확보해두려는 움직임이 이어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한편 16일 기준 국내 신용평가사들이 신용등급에 ‘부정적’ 전망을 붙인 기업들은 51곳에 이른다. 등급조정(레이팅 액션)은 기업 실적이 발표된 후에 이뤄지는 만큼 상반기보다 하반기에 등급 하향 조정이 잇따를 가능성이 크다. /김민경기자 mkkim@sedaily.com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