빠지직거리며 널빤지 부서지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린다. 블루스크린을 보여주는 듯한 파란색 나무 바닥은 지난 5월 29일 전시 개막일만 하더라도 매끈했다. 하지만 관람객들이 지나다닐 수록 작가가 사전에 글씨를 파놓은 자리가 툭툭 뚫리기 시작했다.
“멋진 옷을 입고 백화점에서 장을 보는 꿈을 꿔 본다. 오늘은 장사가 잘 되었나보다. 진열장이 텅텅 비어있다.”
“나는 아직도 옛날 싸구려 컴퓨터를 쓰고 있다. 이제는 바꿔야 할 때가 되었나보다. 자꾸 블루스크린이 뜬다. 안 박사가 집에 방문해서 컴퓨터를 고쳐주고 갔다. 바이러스를 먹었다고 한다. 무슨 말이지? 기계에 바이러스라니?”
기계의 오작동에 빗댄 부조리한 사회, 독일 유학파인 작가가 언어와 피부색 등으로 경험한 차별, 소통에 대한 갈망과 불통의 문제 등이 소소한 일상의 언어로 부서져 내리는 푸른 바닥에 새겨졌다. 미디어 아티스트 이용백의 신작 ‘브레이킹 에피소드(Breaking Episode)’다. 안온한 일상은 그것이 깨졌을 때 비로소 얼마나 평화로웠던 것인지 깨닫게 되듯, 작가가 적은 이야기들은 발에 밟혀 판넬이 깨지면서 제대로 보이기 시작한다. 이 작품이 전시장 한 층을 통째 채웠고, 그 벽을 따라 ‘브레이킹 뉴스 42개의 드로잉(Breaking News 42 drawings)’이 연달아 걸렸다. 영단어 브레이킹(breaking)의 원뜻처럼 작품은 부서지고 깨지는 형식을 취하지만, ‘브레이킹 뉴스’는 속보뉴스를 뜻한다.
작가는 아예 전시 제목도 ‘브레이킹 아트’로 붙였다. 자산문화재단이 제정한 ‘자산미술상’ 수상기념전으로 종로구 평창동 토탈미술관 전관에서 열렸다. 토탈미술관 측은 “변화하는 사회에 대해 숙고하는 과정에서 창작되는 작품이 있다면, 급변하는 세상에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작품 또한 필요한 것이 아닌가라는 작가의 질문은 최근 코로나19(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를 통해 짧은 시간 변화된 일상과 사회에 대한 신작으로 이어지며, 마치 브레이킹뉴스(속보)처럼 관객들에게 다가갈 것”이라고 전시를 소개했다.
발열 체크와 손 세정 후, 마스크를 착용해야만 입장할 수 있는 전시장 정문 앞에는 신작인 ‘36.5℃ 로봇페인팅’ 두 점이 걸려 있다. 적외선 카메라로 촬영한 이미지를 보여주는 듯한, 실제 로봇이 그린 그림이다. 지하 전시장에는 같은 크기로 이용백 작가가 직접 그린 ‘36.5℃ 휴먼페인팅’이 걸려 있다. 코로나 시대의 풍경화 겸 인물화인 셈이다.
울림이 큰 작품은 신작 영상 ‘너무 아름다운 것, 그 너머에는 추악한 것이 있다’이다. 일상에서는 평범한 중년 아저씨인 작가 자신이 등장해 커다란 빨래통을 앞에 두고 옷을 빨고 있는 장면이다. 음색 좋은 클래식 선율과 작가 주변을 돌아다니며 노니는 어린 아들의 웃음 소리가 아름다울 뿐 손으로 빨래를 비비고 방방이를 두드리는 작가나 주변 풍광은 고되다. 작가는 “오프닝 날의 화려함 뒤에는 지저분하고 고된 예술가의 땀과 고뇌가 있다. 나는 함께 전시에 참여한 한국,일본 작가들의 작업복을 모아 손빨래를 했다”면서 “11명의 작업복 숫자만큼 바스켓의 물이 하나의 대야에 담기고 첫 번째 작업복의 세탁이 끝나면 한 통의 바스켓 물이 통에서 덜어진다. 이렇게 반복하다 보면, 제한된 물을 사용하기 때문에 뒤로 갈수록 물의 오염도 심해지고, 오염된 물 때문에 빨래가 되는 것이 더 더러워지는 것은 아닌지 모호해진다”고 작가노트에 적었다. 그는 여기에 “그렇게 빨래를 하는 과정에서 작가들의 땀, 창작과정에서 나왔을 노폐물은 희석되고 교환되고,오염된다”라며 “빨래를 하다 보니 문화교류 역시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든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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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 외에도 작가의 구작이자 대형 설치작품인 ‘백두산’이 다시 선보였다. 이는 신작인 ‘검은 새 1번 깃털’과 나란히 대구를 이룬다. 길이 8m의 대형 유리판 위에 청동으로 제작한 육중한 깃털이 매달린 형상인데, 개막식에서 이 청동 깃털을 거울 위로 떨어뜨려 유리를 깨뜨리는 퍼포먼스가 진행됐다. 작가의 절친한 친구이자 건축가 겸 미술가인 고 김백선(1966~2017)에 대한 추모의 마음이 담겼다는 후문이다.
전시의 마지막 작품은 ‘블라인드 맵:누구나 아는 비밀’이다. 작가는 지난 2016년 개인전에서 ‘누구나 알고 있는 비밀’이라는 제목으로 대형 조각을 선보인 바 있다. 포털사이트의 위성지도 서비스에서 군사 시설을 노출해서는 안된다는 이유로 남북한 군사분계선을 중심으로 일정 공간을 공백으로 표시해 둔 것에서 착안한 것이었다. 이번에는 폭 130㎝, 깊이 30㎝의 정방형 나무 틀에 검은 알루미늄판을 올리고 남북한의 경계 부분만을 뚫어낸 작품이다.
공교롭게도 전시가 시작되던 날에는 코로나19의 재확산 우려가 커져 수도권의 공공미술관·박물관이 일제히 휴관을 결정했다. 전시 폐막 예정일이던 6월 21일을 즈음해서는 북한이 남북공동연락사무소를 폭파하는 등 급속도로 얼어붙은 남북관계가 살얼음판을 방불케 하고 있다. 전시의 시작부터 끝까지, 작가의 ‘속보’가 적중한 셈이다. 전시가 연장돼 7월5일까지 관람할 수 있다. /글·사진=조상인기자 ccsi@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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