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계 3세 미국인인 제롬 김 국제백신연구소(IVI) 사무총장은 12일 서울경제와의 인터뷰에서 “할아버지의 책을 선물하고 싶다”며 ‘The Writings of Henry Cu Kim(김현구의 글)’을 펼쳐 보였다. 조상의 가족사부터 조부의 인생 회고와 이승만·박용만 등 미국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에 관해 서술돼 있다. 이 책은 서대숙 하와이대 명예교수가 대만인의 도움을 받아 영어로 번역했다.
그는 “2015년 IVI에 부임하며 한국에 처음 왔을 때 아이들과 함께 국립대전현충원에 있는 할아버지 묘소를 참배했다”면서 “어려서 할아버지를 뵈면 항상 한지에 한문으로 글을 쓰고 계셨다. 제 딸이 ‘역사 교수가 되고 싶다’고 하는 것을 보면 피는 못 속이는 것 같다”며 활짝 웃었다. 그의 조부는 지난 1909년 미국으로 건너가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현지 지부 활동을 하면서 7,000여명으로부터 20만달러를 모금하는 데 참여해 이를 독립운동자금으로 전달했으며 한인단체장, 한인신문 편집장 등으로 활약하기도 했다. 독립운동자금 운용의 투명성 논란이 일었던 이승만 전 대통령과는 나중에 갈등관계로 돌아섰다.
하와이에서 태어난 그는 하와이대에 진학해 아르바이트를 하며 역사와 생물학을 전공해 3년 만에 졸업했다. 이어 예일대 의대를 다닌 뒤 공군에 5년간 복무했다. 그는 “공군은 듀크대 의대에서 인턴과 레지던트를 하고 전문의를 딸 때까지 내과와 감염병에 대한 추가 연구를 할 수 있게 지원했다”며 “당시 5년간 화이자제약으로부터도 연구비를 받았다”고 회고했다.
1990년 걸프전이 터지자 군 복귀 명령이 내려져 월터리드미육군연구소에서 HIV 백신 연구를 했다. 당시 상사 중에는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CDC)의 책임자인 로버트 레드필드라든지 백악관 코로나19 대책본부를 운영하는 데버라 버크스 등이 있다. 그는 “(아직까지 에이즈 백신이 나오지 않았지만) 감염 예방 가능성을 제시한 유일한 HIV 백신의 임상3상 시험을 위해 태국에서 몇 년간 근무했다”며 “이 백신은 타임의 2009년 ‘올해의 50대 발명품’에 선정됐다”고 소개했다. 그는 HIV백신 개발 등에 관한 논문을 네이처·셀 등에 200여편을 발표했다.
총 20년간 군에 복무하며 미국 육군의무부대 대령으로 전역한 그는 2015년 한국으로 와 IVI 사무총장으로 근무하게 된다. 이 연구소는 유엔개발계획(UNDP)이 저렴하고 효과적인 백신 개발·보급을 위해 1997년에 만들었다. 당시 한국 정부에서 매년 적잖은 운영비를 부담하고 서울대의 땅과 건물을 내놓기로 해 유치 경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그는 “한국이 유치한 최초의 국제기구로 백신 개발과 보급을 위한 글로벌 허브로서 의미가 있다”며 “한국 기업들이 빨리 백신 연구 흐름을 파악할 수 있다”고 평가했다. IVI에는 올 6월 기준 35개국과 세계보건기구(WHO)가 회원으로 가입해 있으며 14개국 150여명이 근무하고 있다. 개도국 감염병 연구에 집중해 주요7개국(G7) 정부는 참가하지 않으나 한국·스웨덴·인도 정부 등이 나서고 빌앤멀린다게이츠재단(2억3,000만달러 기부)을 비롯해 영국의 웰콤트러스트재단, 국내외 기업과 개인의 후원으로 운영된다. 한국후원회의 경우 박상철 전남대 석좌교수가 회장, 이병건 SCM생명과학 대표가 이사장, 문재인 대통령의 부인 김정숙 여사가 명예회장이다.
그는 “가난한 나라의 어린이 250만명이 매년 백신으로 예방 가능한 감염성 질환으로 목숨을 잃는다”며 “IVI는 장내 감염, 호흡기 감염 등의 전염성 질환으로 인한 어린이 사망과 장애를 줄이고자 한다”며 의지를 보였다. IVI는 콜레라 백신을 개발해 세계적으로 널리 보급하고 있으며 개발한 장티푸스 백신도 기업에 기술이전해 1~2년 내 상용화가 기대된다. 주로 코로나19를 비롯해 설사병, 일본뇌염, 살모넬라, A군 연쇄구균, 주혈흡충증, 결핵 등의 백신 연구에 역점을 두고 있다. 동남아·아프리카·남미 등 40여개국에서 이 연구가 이뤄지고 있는데 백신·면역보강제·분석기법 등의 연구개발(R&D)은 서울본부에서 한다. /고광본선임기자 kbgo@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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