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에히메현의 세계적 화학소재 기업인 스미토모화학. 전범기업이기도 한 이 회사의 현관 벽면에는 ‘16세기 외국에서 들여온 회취법(灰吹法)에 의해 구리(銅)를 제련하는 기술에서 시작됐다’고 적혀 있다. 조선의 최첨단 기술로 은이나 동을 대량생산하는 원리를 습득해 부를 축적했다는 얘기다. 이는 곧 우리나라에는 임진왜란의 참화와 일제강점기 식민지 전락이라는 뼈아픈 역사의 시작을 뜻한다.
일본은 과연 조선의 혁신기술을 어떻게 취득해 당시 국제 결제통화였던 은을 대량생산했을까.
조선왕조실록 연산군일기 1503년 5월18일자에는 “양인 김감불과 장례원 종 김검동이 납으로 은(銀)을 불리어 (연산군에게) 바치며 ‘납 한 근으로 은 두 돈을 불릴 수 있는데 납은 우리나라에서 나는 것이니 은을 넉넉히 쓸 수 있게 됐습니다(중략)’라고 하니, ‘시험해보라’고 전교했다”라고 돼 있다. 폭군의 대명사로 알려진 연산군이 과학에 흥미를 갖고 은의 대량생산법을 대궐에서 시연하도록 한 점이 눈에 띈다. 세종대왕조차 “중국의 금·은 조공 요구가 과하다”며 은광 개발을 금한 것을 고려하면 파격적이다. 연은분리법(鉛銀分離法)이라 불리는 이 기술은 잿더미 속에 은광석과 납석을 섞어 녹이면 납은 재에 흡수되고 은만 분리되는 원리다. 동서양을 통틀어 획기적인 퍼스트무버(선도자) 기술이었다. 하지만 시연 3년 뒤인 지난 1506년 중종반정 이후 조정은 다시 전국의 은광 개발을 금지한다.
이 틈을 일본이 놓칠 리 없었다. 일본은 1533년 종단과 계수라는 조선 기술자를 시마네현의 이와미 은광에 데려가 이 첨단기술을 적용한다. 이는 일본이 포르투갈 등과 교역을 본격화해 부를 쌓고 조총으로 무장한 군대를 키우는 계기가 됐다. 이 은광은 17세기 초 들어 볼리비아의 포토시 은광을 제치고 세계 1위가 된다.
문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이와미 은광을 차지해 조총부대를 대거 확충하며 자국 통일에 이어 1592~1598년 조선을 침략해 참혹한 피해를 입혔다는 점이다. 당시 군대마다 심수관을 비롯한 도자기 장인들과 가족들을 대거 끌고 가는 데 혈안이었다. 이후 일본은 막대한 은에다가 고부가가치 도자기 수출에 적극 나서 네덜란드 등을 통해 서양과의 무역을 활발히 편다. 임진왜란 후에는 연간 150톤의 은을 생산해 세계 생산량의 3분의1을 차지할 정도였다. 1868년에는 메이지유신을 한 뒤 무력을 키워 아예 우리나라를 끔찍한 식민지로 만든다.
박희재 서울대 기계항공공학부 교수는 “세계 최고의 혁신기술을 상공업 천시와 과학기술 홀대로 인해 일본에 넘겨줘 역으로 엄청난 고통을 당했다”며 “첨단기술이 뿌리내릴 수 있는 혁신 생태계를 구축하지 못하면 큰 대가를 지불하는 게 역사의 교훈”이라고 힘줘 말했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는 과학기술 혁신 생태계를 꽃피우고 있을까.
여전히 논란이 많다. 국내총생산(GDP) 대비 세계 최고 규모의 정부 연구개발(R&D) 예산을 대학과 출연연·기업에 지원하고 있지만 뚜렷한 성과를 내고 있다는 평가는 찾기 쉽지 않다. 문재인 정부에서 과학기술 생태계의 혁신을 본격화하고 있지만 대학과 출연연은 논문이나 특허 위주 연구라는 구태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정우성 임앤정 공동대표변리사는 “논문 위주 연구에다가 시장과 동떨어진 특허가 대거 양산되고 있다”고 전했다. 기술 기반 벤처·스타트업도 중간에 엑시트(이익실현)할 수 있는 인수합병(M&A) 문화도 부족하다. 이우일 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장은 “연구자가 기업에 기술을 이전하거나 창업하는 기술사업화 풍토가 정착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18세기 영국이 1차 산업혁명을 할 때 특허보호와 사업화, 과학기술 우대, 벤처금융, 해외 네트워크라는 혁신 생태계를 바탕으로 했던 게 오늘날의 4차 산업혁명 시대에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kbgo@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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